“AI 시대, 한국 경쟁력의 뿌리”
신경영·인재제일 경영으로 문화 혁신
KH컬렉션 2만3000점 기증으로 국가의 격 높여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서거 6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기술·경영·문화 분야의 유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반세기 전 불모지였던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어 삼성을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운 결단이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 한국 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23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선대회장의 6주기 추도식이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가족 선영에서 엄수됐다. 추도식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가족들을 비롯해 삼성 관계사 경영진들이 참석하했다. 추도식 이후 참석자들은 경기 용인시 삼성 인력개발원에서 오찬을 함께 하며 이 선대회장을 기렸다.
전 세계적으로 AI 열풍이 불고, 이에 힘입어 한국 반도체 산업이 ‘초호황’을 기록하면서 이 선대회장의 발자취가 주목을 받고 있다. 40여년전 모두가 반도체는 한국에서 안 된다고 할 때 처음 반도체에 뛰어든 이 선대회장의 안목 덕에 한국은 세계적인 반도체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 선대회장은 1974년 자금난에 빠진 한국반도체에 개인재산을 투자하며 반도체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의존했고, 1차 오일쇼크 여파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조차 구조조정에 나서던 때였다. 삼성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삼성은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 선언’을 계기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던 반도체 공장을 6개월 만에 지었고,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선발업체와의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한 데 이어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미국·일본 기업이 주도하던 시장에서 사업 시작 약 20년 만에 정상에 선 것이다.
비결은 불황을 기회로 삼은 선행투자였다. 삼성은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라인을 늘릴 때 6인치로 전환했고, 1987년 일본 업체들이 불황으로 투자를 줄일 때 오히려 신규 라인을 세웠다. 1990년대에는 8인치 웨이퍼 양산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했으며, 닷컴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차세대 기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는 기술·원가·생산능력에서 후발주자가 따라오기 힘든 ‘초격차’ 전략의 토대가 됐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기준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39.4%, 낸드플래시 29.3%로 두 부문 모두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선대회장은 반도체를 넘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로봇이 산업 지형을 바꿀 것이라고 일찌감치 내다봤다. 1987년 회장 취임 무렵부터 컴퓨터 활용의 대변혁과 전자·정보기술과 제조업의 결합에 따른 산업 간 경계 붕괴를 예견했다.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도 전자기술과 결합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봤고,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1990년대에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 남는 핵심 역할은 창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런 구상은 생성형 AI와 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AI 고도화로 고성능 메모리와 저장장치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가 강조한 미래기술에 대한 선제적 준비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재제일’ 경영도 핵심 유산으로 꼽힌다. 그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론을 바탕으로 국적과 출신을 가리지 않는 최고 인재 확보를 강조했다. 1990년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가 대표적이다. 직원들이 해외에서 장기간 머물며 현지 언어와 문화, 시장을 익히도록 급여와 교육비·체류비를 지원했다. 도입 당시 비서실이 20여명 선발안을 올리자 규모를 10배로 늘려 200여명을 파견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육성한 직원이 회사를 떠나더라도 결국 국가에 기여하는 인재가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포한 ‘신경영’은 삼성이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됐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신경영은 양 위주의 성장에서 벗어나 제품 품질은 물론 사람·조직·제도·기업문화 전반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혁신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해 7월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하는 ‘7·4제’를 도입해 업무 집중도를 높이고 퇴근 후 자기계발을 독려했다. 생산현장에는 불량 발생 시 원인을 해결할 때까지 라인을 멈추는 ‘라인스톱제’를 적용했다.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품질 기준에 못 미친 휴대전화 등 약 500억원어치 제품을 불태운 ‘불량제품 화형식’은 품질경영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으로 남아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족적이 뚜렷하다. 이 선대회장은 문화유산 수집과 보존을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으로 여겼고, 유족들은 이 뜻을 이어 2021년 4월 그가 평생 모은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 전통미술 대표작과 김환기·박수근·이중섭의 근현대 작품, 모네·피카소 등 해외 거장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른바 ‘KH컬렉션’이라 불리는 순회 전시는 서울을 시작으로 광주·대구·청주·제주와 경남·부산·울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국내 순회전 누적 관람객은 350만명을 넘어 단일 컬렉션 전시로는 국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해외에서도 반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시작된 국외 순회전은 올해 3월 시카고미술관을 거쳐 이달 1일부터 영국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영국박물관이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을 여는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전시는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서화, 근현대 미술을 아우르며 2000년에 걸친 한국 예술의 흐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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