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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닫힌 교문 너머 세계의 마음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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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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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의 자리를 지킬 것인가, 진리라고 믿는 신앙을 따를 것인가. 김영운은 신앙을 택했다. 그러나 자신을 내친 대학 총장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렸고 자신의 전도 방식도 돌아봤다. 통일교회 초창기 신앙인 김영운 교수의 증언에는 눈길이 머무는 대목이 있다.

 

1915년 황해도 해주의 유교 가정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에 감리교회에 들어갔다. 소학교 교사로 일할 때는 ‘사랑주의’를 신조로 학생들을 대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열망도 컸다. 1937년 일본 간세이가쿠인대학(関西学院大学) 신학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여학생을 받지 않던 곳이었지만 길이 열렸고, 뛰어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다.

 

해방 뒤 교사와 강사로 일하던 그는 신학자 현영학의 추천으로 이화여대 사회사업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캐나다 선교부의 장학금으로 토론토대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수료 뒤에는 영국과 독일을 방문해 에큐메니컬 운동과 사회사업, 국가재건을 연구했다. 교파 간 협력과 사회를 돌보는 일, 나라를 다시 세우는 과제를 함께 공부한 것이다.

 

1952년 귀국해 전쟁통에 다시 강단에 섰다. 이화여대는 부산 피란지 천막 교사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두 달간의 귀국 길에도 배 안에서 강의를 준비한 덕분에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교단에 설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무너진 나라에서 배움을 이어가던 학생들에게 그가 해외에서 익혀온 지식은 신세계를 보여주었다.

 

1954년 12월, 그는 새로운 가르침을 직접 알아보고자 통일교회를 찾아 문선명 총재와 유효원 초대 협회장을 만났다. 가르침에 공감은 했지만, 이 선택은 대학의 신앙 전통과 충돌했다. 김활란 총장은 그를 아끼며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학교에 남으려면 통일교회에 나가지 말고, 계속 나가려면 학교를 떠나라는 통고가 왔다. 그는 결심을 편지로 답했다.

 

그에게 종교는 생명에 관계된 문제였다. 진리라고 믿는 것을 지위를 위해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총장을 적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오해가 풀려 다시 격의 없이 대화할 날을 바랐다. 학교와 학생을 책임진 김 총장의 처지도 헤아렸다.

 

그는 훗날 자신의 공동체도 돌아봤다. 전도 방식이 편협하고 근시안적이지 않았는가. 아무리 진리라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쏟아내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살펴 치료하듯 듣는 사람의 처지를 고려해야 했다. 신앙의 확신만큼 전달하는 방식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성찰이었다. 사랑과 진리로 상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후 해외 선교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이어졌다.

 

1959년 1월 4일, 그는 학생 신분으로 미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선교의 출발지는 오리건주 유진이었다. 어린 네 남매를 키우는 여성의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숙식하며 학교에 다녔다. 대학 강단에 섰던 학자는 낯선 나라에서 공부와 생계, 전도를 함께 감당했다.

 

그해 기독교 잡지 70곳에 교리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작은 모임과 교회를 찾아가 사람들을 만났다. 버스를 타고 여러 도시의 구도자를 찾아다니며 강의와 개인지도를 거듭했다. 원리를 영어로 다시 옮기며 하루 16시간씩 일한 끝에 책 1200권을 인쇄했다고 회고했다.

 

1961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활동을 넓혔다. 모임의 공간은 ‘교회’ 대신 ‘센터’라고 불렀다. 청년들에게 다가갈 이름을 고민한 것이다. 함께 살던 청장년들은 직장에 다니며 생활비와 활동비, 출판비를 마련했다. 식당 종업원과 우체부로 일하며 다른 도시를 개척한 신자들도 있었다. 현지인들의 노동과 자립이 선교를 뒷받침했다.

 

미국에서 전도된 사람들은 다시 해외 전도에 나섰다. 독일어 번역을 준비한 신자들은 독일로 돌아가 활동했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으로도 발걸음이 이어졌다. 각자의 언어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출발한 신앙이 미국과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성과를 얻지 못하거나 동료끼리 충돌하기도 했다. 김영운은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상대 사회의 문화와 제도, 생활을 알고 한국어의 뜻을 현지인이 이해할 말로 옮겨야 했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복음 전파와 함께 또 다른 세계를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선교의 일환으로 『세계의 종교』와 『통일신학』을 펴냈다. 10년간 발간한 월보에는 복음서 연구와 세계 종교 소개, 각국 신자들의 활동과 편지를 실었다. 글로 멀리 떨어진 공동체를 잇고, 한국에서 시작된 종교사상이 세계와 만나도록 언어와 지식의 다리를 놓은 것이다. 자신이 접한 가르침이 옳다고 확신한 뒤 이방 선교에 생애를 걸고, 쉼 없이 전도와 저술에 힘쓴 김영운은 ‘통일교판 사도 바울’을 떠올리게 한다.

 

김영운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상대의 처지를 살피고, 통하지 않을 때는 자신부터 돌아봤다. 확신만 외치는 사회일수록 이런 성찰이 필요하다. 닫힌 교문을 나섰던 김영운은 세계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열려고 했던 문은 ‘하나님 아래 한 형제’로 만나고자 하는 인류의 마음이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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