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안 되면 안 입겠다”…5년 만에 다시 우승
2009년 4월 제주 라헨느 골프장.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국내 개막전 김영주골프여자오픈 최종라운드. 프로 언니들을 제치고 선두를 달리던 건 외고생이었다. 대원외고 2학년, 16세 아마추어.
13번 홀(파4). 티샷은 잘 맞았다. 공은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그런데 무언가에 맞고 방향이 꺾였다. 페어웨이에 있던 맨홀 뚜껑이었다. 공은 OB 구역으로 사라졌다. 트리플 보기. 우승컵은 선배에게 넘어갔다.
17년 뒤 그 외고생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13승을 쌓았다. ‘빨간 바지의 마법사’ 김세영(33)이다.
태권도장 집 딸
아버지 김정일씨는 태권도장을 운영했다. 젊은 시절 태권도 시범단으로 전국을 돌았다. 딸도 도장에서 컸다. 초등학생 때는 태권도 선수로 뛰었고 국기원 공인 3단을 땄다.
골프는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갔다가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06년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에서 최연소로 우승했고 이듬해 국가대표가 됐다. 키 163㎝의 작은 체구에서 장타가 나오는 비결로는 늘 태권도로 다져진 하체가 꼽힌다.
도장에서 물려받은 건 몸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두려워도 쫄지 말라.”
마지막 날엔 빨간 바지
김세영은 유독 마지막 날에 강했다. KLPGA 투어에서 거둔 5승은 모두 역전승이었다. ‘역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종라운드마다 입는 빨간 바지도 아버지의 아이디어다. 불같은 딸의 성격을 눌러 주는 데 빨간색이 맞는다는 이유였다. 김세영은 빨간 바지를 입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운이 난다고 했다.
LPGA 투어 신인이던 2015년 하와이 롯데 챔피언십에선 박인비와 맞붙었다. 18번 홀 칩샷을 그대로 넣어 연장으로 끌고 갔고 연장 첫 홀에선 두 번째 샷을 홀에 꽂았다. 그날도 빨간 바지였다. ‘빨간 바지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굳어진 순간이다.
“빨간 바지 안 입겠다”
2020년 11월 펠리컨 챔피언십 이후 우승이 끊겼다. 2025년엔 세계랭킹이 50위까지 밀렸다. 우승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서기를 되풀이했다. 빨간 바지는 어느새 짐이 됐다. 마지막 날마다 꺼내 입었지만 트로피는 따라오지 않았다.
2025년 10월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이 열린 전남 해남 파인비치 골프링크스. 고향 영암과 가까운 곳이었다. 김세영은 첫날부터 선두를 달렸다.
마지막 날 아침, 그는 다시 빨간 바지를 입었다. 이번에도 안 되면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경기 초반 추격자들이 따라붙었을 때 떠올린 건 아버지의 그 말이었다.
“두려워도 쫄지 말라.”
5년 만의 우승, LPGA 통산 13승째였다.
김세영은 2026년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대회 사상 첫 2연패에 도전한다. 17년 전 맨홀 뚜껑 앞에서 멈춰 섰던 외고생은 이제 디펜딩 챔피언으로 티잉 그라운드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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