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가을빛 한자리에 모인 가을 동화
급수탑 만나는 100년 역사 연천역 광장 지나
미술관 변신한 문화벽돌공장으로 시간 여행
꽃길을 걷는다. 작은 바람에도 한들한들 고개 흔드는 연분홍 코스모스 한 송이 한 송이 눈동자에 아로새기며. 빨강, 노랑, 하양 백일홍은 화가의 팔레트를 엎질러 놓은 듯 흐드러지고 보랏빛 버들마편초와 아스타는 바람결 따라 고혹적인 자태로 춤을 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아득한 시선 끝까지 노을처럼 번져 있는 새빨간 댑싸리 바다. 파란 하늘 아래 세상의 모든 가을빛이 한자리에 모인 풍경은 천상의 화원에 들어선 듯, 꿈결 같다. 연천 댑싸리 정원 꽃물결에 몸을 맡기자 가슴 한구석이 봉숭아 꽃물 든 손톱처럼 고운 가을로 물든다.
◆불타는 댑싸리 너머 펼쳐진 가을 동화
경기 연천군 중면 삼곶리 임진강변에 자리한 댑싸리정원은 면적이 8만2390㎡에 달한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나 전신주 하나 없어 드넓은 초원이 그대로 하늘과 맞닿는다. 이곳은 본래 군남홍수조절댐 건설 이후 잡초만 무성하던 홍수터였다. 접경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삼곶리 주민들이 2021년부터 직접 댑싸리 모종을 길러 옮겨 심으며 정원을 일궜고, 지금은 연간 20만명 이상이 찾는 연천의 대표 가을 명소가 됐다.
정원 여행은 코스모스 진입로에서 시작된다. 분홍, 보라 코스모스가 길 양옆으로 사람 키만큼 자라 풍성하게 피었는데 잎까지 큼직해 꽃의 터널을 지나는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소녀의 순정’이라는 꽃말처럼 수줍은 분홍빛 꽃잎이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드니 공기 속엔 가을의 서정이 가득하다. 입구에서 빌려주는 연두, 보라, 분홍, 노랑, 하양 양산을 받쳐 든 여행자들이 꽃 사이를 거니니 풍경은 한층 알록달록해진다.
안으로 더 들어서면 주황, 노랑 황화코스모스가 모습을 드러내며 색이 더욱 다채로워진다. 꽃말은 ‘넘치는 야성의 아름다움’과 ‘애정’. 쑥갓처럼 넓은 잎 위로 타오르는 귤빛 꽃송이가 꽃말 그대로 뜨거운 생명력을 뿜어낸다. 급기야 빨강, 하양, 노랑 백일홍 꽃밭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은빛 억새가 피어나기 시작해 한 편의 가을 동화를 보는 듯하다. 백일홍은 이름처럼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백일 동안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정원을 밝힌다. 꽃말은 ‘인연’과 ‘그리움’이다. 소중한 이와 나란히 걷다 보면 이 가을 풍경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게 될 것만 같다.
백일홍 맞은편에서 드디어 정원의 주인공 댑싸리가 등장한다. 동글동글한 댑싸리 2만3000여 그루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아직 초록빛을 담은 댑싸리와 단풍처럼 짙은 빨강으로 물든 댑싸리가 뒤섞여 색이 한결 선명하다. 댑싸리는 명아줏과의 한해살이풀이다. 가지가 빽빽하게 갈라져 따로 다듬지 않아도 스스로 소담한 공 모양을 잡아간다. 키는 보통 60㎝에서 크게는 1.5m까지 자라 산책로에 서면 무릎에서 허벅지 높이에 닿는다. 댑싸리는 여름 내내 싱그러운 연둣빛을 띠다가 8월 말부터 서서히 물들기 시작해 9~10월이면 분홍, 주황, 붉은색으로 점차 옷을 갈아입는다. 한여름 잎겨드랑이에 연녹색 꽃이 피지만 워낙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으니, 댑싸리의 진짜 꽃은 가을에 물드는 잎인 셈이다. 꽃은 아니지만 ‘겸허’와 ‘청초한 미인’이란 꽃말도 지녔다. 서양에서는 불타는 듯한 모습 때문에 ‘버닝 부시(Burning Bush)’로 불린다.
이름에는 옛 시골살이가 담겨 있다. 다 자라 바짝 마른 댑싸리를 뿌리째 뽑아 묶으면 마당을 쓰는 빗자루가 됐다. 쓰임새는 빗자루만이 아니었다. 봄에 돋는 부드러운 새순은 나물로 무쳐 먹었고, 씨앗은 이뇨를 돕거나 피부 가려움증을 다스리는 약재로 썼다. 일본 아키타현에서는 댑싸리 열매를 삶아 껍질을 벗겨낸 지름 1~2㎜의 연둣빛 알갱이 ‘톤부리’를 특산물로 즐기는데, 톡톡 터지는 식감이 캐비어를 닮아 ‘밭의 캐비어’로 불린다. 댑싸리는 건조하고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쑥쑥 자랄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댑싸리를 지나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주황, 노랑 마리골드가 반긴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처럼 환한 얼굴이다. 언덕을 넘어 전망대에 오르면 황화코스모스가 황금빛 바다처럼 발아래 광활하게 펼쳐진다. 계단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버들마편초가 차지했다. 가는 줄기 끝에 보라색 꽃을 오밀조밀 매단 버들마편초는 바람이 불면 보랏빛 구름이 허공에 떠서 군무를 추는 듯하다. 꽃말은 ‘가족의 화합’과 ‘성실함’이니, 거친 홍수터를 매일같이 성실하게 일궈낸 주민들의 마음이 이 보랏빛 꽃길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하다. 계단 전망대의 액자 포토존에 서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근사한 인생샷을 남길 수 있다.
돌아 나가는 길에는 별을 닮은 보랏빛 아스타 꽃밭이 붉은 댑싸리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꽃말은 ‘믿음’과 ‘추억’으로, 오랜 인내로 정원을 일군 주민들의 믿음과 이곳에서 가을의 추억을 담아가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한데 겹쳐진다. 마지막 선물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작은 오솔길이다. 양옆을 황화코스모스가 빽빽하게 채워 꽃 속에 파묻힌 채 걷는 기분이다.
정원 앞 광장에선 18일까지 진행되는 축제가 한창이다. 도토리빈대떡, 발효콩비지, 들기름 칼국수, 도토리묵 무침 등 연천의 향토 음식을 맛보며 꽃길 산책을 마무리하기 좋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축제 기간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 연천역과 정원을 오가는 임시 셔틀버스가 30분마다 운행한다. 축제 이후에는 11월1일까지 평일 1시간, 주말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
정원이 품은 보물은 꽃뿐만이 아니다. 정원 한편에는 연천 삼곶리 철기생산 마을유적이 자리한다. 군남댐 수몰 예정지를 조사하던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2010년 발굴한 곳으로, 기원후 150~350년 무렵 약 200년 동안 초기 백제 세력권에서 철기를 만들던 대장간 마을로 조사됐다. 집자리 21기와 구덩이 81기가 확인됐으며, 철을 다룰 때 나오는 찌꺼기인 철 슬래그, 쇠를 두드릴 때 떨어져 나간 미세한 철 조각, 바람을 불어넣던 송풍관, 숫돌과 화로까지 쏟아져 나왔다.
정원 입구 곁에는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도 우뚝 솟아 있다. 2~3세기 초기 백제가 쌓은 적석총으로, 서울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백제가 임진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유적으로 평가된다.
◆100년 역사 품은 연천역, 낭만의 광장으로
1호선 종착역인 연천역에 내리면 과거와 현재가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광장이 여행자를 맞는다. 연천역은 1912년 경원선 철도역으로 문을 연 100년 넘은 역이다. 오랫동안 1호선은 소요산역까지만 다녀 연천에 가려면 디젤 통근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2023년 12월 전철이 연장 개통하면서 서울에서 한 번에 닿는 수도권 생활권이 됐고, 고인돌을 형상화한 신역사도 이때 새로 들어섰다.
역사 앞 광장에서는 바닥 음악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분수 곁에는 ‘거리의 악사들’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한 사람은 기타를 메고 노래하고, 다른 이는 벤치에 앉아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앉으면 재미있는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연천군은 이곳을 문화예술 광장으로 꾸며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지역 음악가들의 정기 버스킹 공연을 열고 있다. 여름과 가을밤에는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진 분수 쇼가 낭만을 더한다.
광장 너머로 시선을 옮기면 하얀 원통형 급수탑이 묵직하게 서 있다. 일제강점기 경원선을 오가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 땅이던 연천역은 군수물자를 부리던 거점이었고, 급수탑을 좌표 삼은 폭격이 쏟아졌다. 다른 역 시설은 모두 사라졌지만 급수탑만은 살아남아 지금도 외벽에 총탄 자국을 선명하게 품고 있다. 그 곁에는 칙칙폭폭 기적을 울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증기기관차 모형이 놓여 옛 철도역의 풍경을 되살린다.
연천의 시간 여행은 전곡읍 은대리 문화벽돌공장으로 이어진다. 높이 솟은 굴뚝과 붉은 벽돌 벽이 먼저 여행자를 맞는 이곳은 1988년부터 실제 벽돌을 굽던 공장이었다. 연천은 화산 활동으로 생긴 현무암 대지 아래 질 좋은 점토층이 발달해 벽돌 생산의 적지로 꼽혔다. 전국의 건물을 올리던 붉은 벽돌이 이곳에서 생산됐지만 대체 건축 자재에 밀려 2000년대 초 문을 닫았고, 이후 20년 가까이 잡초 속에 방치됐다. 연천군이 폐산업시설의 가치에 주목해 리모델링에 나섰고, 공장은 2025년 7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장을 허물지 않고 옛 모습을 살렸다. 벽돌을 굽던 가마터와 붉은 벽돌 벽, 높은 천장, 불구멍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바닥 일부는 강화유리로 덮어 공장 시절의 흔적을 내려다볼 수 있게 했다. 거칠고 날것 그대로인 벽돌 사이로 회화, 조각, 설치미술, 미디어아트가 놓여 유럽의 재생 미술관에 온 듯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전시장 한편에는 벽돌공장의 역사를 기록한 아카이브 공간도 조성돼 노동자들의 땀이 밴 작업화와 누렇게 바랜 장부를 만날 수 있다. 카페 ‘스톤’에선 벽돌 모양을 그대로 본뜬 적벽돌 파운드케이크와 흑벽돌 파운드케이크가 인기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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