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훈 기자]미국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 기록(27회)을 보유한 뉴욕 양키스는 2000년대에 ‘악의 제국’이라 불렸다.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스타급 선수들을 쇼핑했기 때문이다. 2020년대 들어 그 별칭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에게 넘어갔다. ‘신 악의 제국’이라 불리는 다저스는 과거 양키스에 비해 쇼핑 수준이 훨씬 더 강력하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악랄하다. 불법은 아니지만, 꼼수로 시장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다저스가 양키스를 뛰어넘어 ‘신 악의 제국’이 된 비결은 디퍼(Defer·연봉 지급유예)다. 팀 이름을 다저스에서 ‘디퍼스’라고 바꿔 불러도 좋을 만큼 팀 내 스타급 선수 대부분이 디퍼에 따라 추후에 연봉을 지급받는 구조를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팀의 상징이자 간판스타인 오타니 쇼헤이다. 지난 2023년 12월, 오타니는 당시 역대 프로스포츠 사상 최대규모인 10년 총 7억달러, 한화로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연평균 7000만달러에 이르는 대형계약이지만, 거기엔 비밀이 숨겨있다. 계약 기간인 2024년부터 2033년까지는 매년 200만달러를 받고, 2034년부터 2043년까지 매년 6800만달러를 수령하는 구조다.
디퍼 계약에서는 보통 현재 수령하는 연봉이 지급유예된 연봉보다는 더 크다. 다만 오타니는 전체 금액의 97.1%의 금액이 디퍼다. 이렇게 되면 오타니가 받게 될 2034년부터의 6800만 달러는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인해 평가절하돼 오타니의 연봉은 다저스 페이롤에 4600만달러로 잡힌다. 다저스는 오타니에게 역대 최대규모 계약이라는 명분을 주고, 그의 가치보다 하향된 페이롤을 통해 다른 스타급 선수를 잡는 실리를 얻은 것이다.
다저스에는 이런 선수들이 즐비하다. 2025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블레이크 스넬도 5년 총 1억8200만달러 중 6500만달러가 디퍼고, 토미 에드먼의 5년 7400만달러 연장계약에도 2500만달러로 디퍼다.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를 FA 재계약으로 붙들어두는 과정에서 3년 6600만달러를 안겼는데, 이중 2350만달러가 디퍼다. 이밖에 무키 베츠(1억1500만 달러), 프레디 프리먼(5700만 달러), 윌 스미스(5000만 달러), 태너 스캇(2000만달러)까지 주전 대부분이 디퍼 계약을 맺었다. 디퍼를 다저스만 활용하는 게 아니지만, MLB 전체 디퍼 금액 중 절반이 다저스가 차지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화폐가치는 떨어지기에 디퍼는 선수들에게 손해다. 그럼에도 슈퍼스타급 선수들이 다저스와 디퍼 계약을 맺는 이유는 딱 하나.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다. 디퍼를 수용해 팀 페이롤을 낮추면 남는 틈을 활용해 더 많은 스타급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LA에인절스에 입단해 가을야구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오타니는 다저스 입단 첫 해인 2024시즌 첫 포스트시즌에 올라 월드시리즈도 제패했다.
디퍼스, 아니 다저스의 디퍼 전략은 지난 2년간 제대로 먹혔다.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3연패 도전을 위해 고삐를 더 당겼다. 1998~2000 양키스 이후 첫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기 위해 지난겨울 FA 최대어로 꼽힌 카일 터커를 4년 2억4000만달러에 잡았고, 현역 최고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에드윈 디아즈도 3년 6900만달러에 영입해 불펜을 보강했다. 터커와 디아즈 영입에도 디퍼는 활용됐다. 다만 예전만큼 디퍼 비중이 크진 않았다. 터커는 디퍼 금액이 3000만달러에 불과했고, 디아즈는 350만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앞두고는 지난 2년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독식한 현역 최고 좌완 선발 투수인 타릭 스쿠벌까지 데려왔다. 그야말로 다저스가 아니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친 행보였다.
그러나 다저스의 2026시즌의 엔딩은 멸망 그 자체다. 처참하게 깨졌다. 디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다저스를 무너뜨린 게 양키스나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메츠 등 다른 빅마켓팀도 아니다. 바로 연봉 총액 19위에 불과한 스몰마켓팀인 밀워키 브루어스(1억2500만달러)였다. 성적이 연봉 순이 아니라는 것임을, 돈으로 모든 게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밀워키가 야구로 ‘정의구현’한 셈이다.
다저스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유니클로필드 앳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7전4승제) 4차전에서 밀워키 브루어스에 4-6으로 역전패했다.
밀워키 원정에서 치러진 1,2차전을 모두 패하고 안방으로 돌아온 다저스는 홈에서마저 밀워키에 한 수 아래의 모습을 보이면서 4전 전패로 올 시즌을 마감하게 됐다. 1998~2000 뉴욕 양키스 이후 26년 만이자 역대 5번째로 월드시리즈 3연패에 도전했던 다저스의 2026년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밀워키는 자체 생산 선수들과 저비용 고효율 선수들로 로스터를 꾸리는 스몰마켓팀의 정석을 보여주며 지난해 NLCS에서 4전 전패로 쓰라린 아픔을 줬던 다저스에게 4전 전승을 거두며 ‘완벽한 복수극’에 성공했다. 1969년 창단해 1982년 아메리칸리그를 제패한 뒤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게 마지막이었던 밀워키는 44년 만에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로 옮긴 이후로는 처음이다. 1982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3승4패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밀워키는 이제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한다.
오타니를 비롯해 무키 베츠, 프레디 프리먼으로 이어지는 MVP 3인방에 터커, 먼시, 테오스카 등 무수히 많은 올스타급 이상 슈퍼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한 다저스 타선은 이번 NLCS에서 침묵했다. 득점권에서 43타수 5안타에 그쳤을 정도다. 3차전까지 내내 극악의 부진을 보이다가 4차전에서 쓰리런포를 터뜨리며 부활하는 듯 했던 오타니는 4-5로 뒤진 7회 1사 3루에서 희생플라이조차 치지 못하고 삼진을 당해버렸다. 다저스 멸망의 상징같은 장면이었다.
다저스의 내년은 어떻게 될까. 주전급 야수들은 점점 노쇠화되고 있다. 싱싱한 투수들의 공에 반응은 점점 늦어지고 있다. 또 한 번 ‘전가의 보도’인 디퍼를 활용해 선수단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까? 아니면 내실을 다지게 될까. 어쨌든 중요한 건 다저스의 2026시즌은 명백히 실패다. 다저스의 현재 선수단은 월드시리즈 우승이 아니면 실패라는 낙인이 찍힐 만큼, 디퍼라는 ‘꼼수’로 만들어진 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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