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베리 러브’ 등 작품 잇단 전파
기획·연출·유통·IP까지 전방위 협력
日방송, 젊은 시청자 감소 돌파구 찾아
K콘텐츠 성공 사례 벤치마킹 나서
韓도 풍부한 日 내수시장 공략 윈윈
작업방식·제작문화 차이 이해는 과제
일본 NTV는 지난 7일 밤 드라마 ‘메리 베리 러브’ 방영을 시작했다. 한국의 유명 공간 기획자 유빈(지창욱)이 폭삭 망한 뒤 찾아온 일본의 섬에서 현지인 농부 카린(이마다 미오)을 만나며 생기는 이야기를 영상에 담았다. NTV와 CJ ENM의 첫 공동 프로젝트로, 한·일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것은 물론 시나리오·연출에서도 양국의 협업이 이뤄졌다.
하루 앞선 6일에는 드라마 ‘키드냅게임’이 일본 후지TV 전파를 탔다. 아시아 7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납치 사건을 다룬 스릴러물인데, 이준기와 사카구치 겐타로 등 한·일 양국 배우들이 출연한다. 채널A에서도 방영되는 이 드라마는 양국뿐 아니라 홍콩까지 참여한 국제 공동제작 프로젝트로 제작됐다. 이들 두 드라마는 TV 방영 직후 디즈니플러스, 뷰(Viu)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세계 곳곳의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日 방송가에 부는 韓과의 협업 바람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한·일 합작 콘텐츠가 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방송가에서 공동제작 열기가 뜨겁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만들어져 원빈, 후카다 교코가 출연한 ‘프렌즈’ 등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는 ‘겨울연가’, ‘사랑의 불시착’ 등 완성된 콘텐츠를 수입하거나 ‘시그널’, ‘이태원 클라쓰’ 등 한국 작품을 리메이크한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변화의 신호탄 격인 작품이 2024년 초 방영된 드라마 ‘아이 러브 유’(Eye Love You)이다. 차현지 프로듀서가 참여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머리를 맞댔다. 한국 배우(채종협)가 일본 TBS방송의 저녁 황금시간대 드라마 주인공을 맡은 것은 이례적이었고, 한국 배우가 한국말로 하는 독백이 일본어 자막 없이 흐르는 것이나 일본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직접적인 애정 표현이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테레비도쿄의 ‘김밥과 주먹밥’(한국 제목 ‘첫입에 반하다’)이나 TBS ‘드림 스테이지’처럼 일본 지상파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제 일본 배우가 한국인 역을 맡아 한국어 대사를 읊거나(NTV 드라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한·일 배우가 상대국민 역할을 맡는 현상(영화 ‘가타이·過怠’)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제작자나 기획사, 시나리오 작가, 연출자 등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한·일 콘텐츠 공동제작은 한국 웹소설·웹툰을 일본 애니메이션 기술로 만든 ‘나 혼자만 레벨업’처럼 한국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현지화한 사례, 예능 프로그램 ‘무한 루프’ 등 양국 공동 기획·개발, 드라마 ‘마물’ 같은 공동 연출·제작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로 잘 알려진 배우 아오이 유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시리즈 ‘가스인간’은 1960년 개봉한 일본 특수촬영물 ‘가스인간 제1호’가 원작인데, ‘부산행’과 ‘기생수: 더 그레이’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다. 보그 재팬에 따르면 일본 영화사 도호로부터 리부트 의뢰를 받은 연 감독이 이 작품을 골랐고 가타야마 신조 감독에게 소셜미디어 메시지로 연출을 요청했다. 보그 인터뷰에서 연 감독은 “(작품을 구상하며)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이나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고, 가타야마 감독은 “한국에서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 현장 견학을 통해 현장에서 영상을 편집해 스태프와 공유하며 촬영을 진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번에 그 스타일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韓 ‘역동성’ 日 ‘섬세함’의 조화
한·일 공동제작이 증가한 배경에는 일본 방송가의 위기감이 있다. 저출생·고령화와 젊은층의 TV 이탈로 광고 수입에 의존하는 기존 비즈니스 모델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 시장으로의 확장이 불가피하지만,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23년 일본 콘텐츠의 해외 매출 약 5조8000억엔(49조2300억원) 가운데 영화·방송은 1405억엔(1조1900억원)에 그쳤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K콘텐츠를 보유한 한국의 글로벌 기획·제작·유통 경험을 공유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입장에서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와의 협력은 “K콘텐츠를 선호하는 각국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면서 한 수 배울 기회”라고 전했다. 일본 업계에서는 특히 세계적 수준의 영상미와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를 한국의 장점으로 꼽는다. 시나리오 작가 하바라 다이스케는 아사히에 “한국에서는 엔터테인먼트가 수출 산업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고 할리우드 시스템에 한국의 정서와 사회 문제를 녹여내는 노하우가 있다”며 “바로 옆에 본보기가 있으니 지금은 일본이 철저히 배워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이혜은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비즈니스센터장도 “일본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전개력과 제작 시스템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고 진단했다.
한국에도 일본과 손잡는 이점이 있다. 고액 개런티 등으로 치솟은 제작비와 국내시장의 성장 한계를 뚫을 돌파구로서 일본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것이다. 인구 1억2000만명의 거대 내수 시장, 만화·소설 등 풍부한 원작 IP, 방송·출판·광고·유통 기업이 축적해온 사업 기반, 한국보다 작은 제작비 부담 등이 일본의 강점이다.
대형 OTT 플랫폼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점도 한·일 공동제작을 부추기고 있다. 한·일의 유명 배우가 함께 출연하면 양국 시청자를 모두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세계적 관심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콘텐츠를 독점 방영하려는 OTT 업체로부터 예산을 확보하게 되면, 제작비 걱정 없이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양국 창작자들의 교류·협력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문화적 다양성, 새로운 정서 창조도 기대할 수 있다.
도쿄신문은 “한류 붐이 시작된 지 약 20년이 지나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수출하거나 구매하는 관계에서 공동으로 기획하고 IP를 육성하며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파트너로, 한·일 콘텐츠 산업이 새로운 협력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질적 제작 환경 이해 필요
최근에는 작품별 협업을 넘어 아예 공동제작을 상시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 CJ ENM과 TBS, 일본 OTT 서비스 유넥스트(U-NEXT)가 합작법인 스튜디오모노와를 설립했다. 양국 역량을 결집해 기획·개발부터 제작, 유통, IP 확장까지 이어지는 콘텐츠 생태계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다만 작품 제작 관행이나 IP 권리 배분, 의사결정 방법상 차이 등 양측이 넘어야 할 벽도 많다. 가령 한국은 제작사·방송사·플랫폼을 중심으로 비교적 신속하게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구조이다. 반면 일본은 방송사·광고회사·출판사·배급사 등이 참여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투자 위험 분산에는 유리하지만 신속한 사업 추진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촬영 현장 진행 방식에도 다른 점이 많다. 가타야마 쓰요시 TBS코리아 대표는 지난달 29일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비즈니스센터에서 열린 ‘한·일 콘텐츠 공동제작 위크 2026’ 행사에서 “현장에서의 관행도 사고방식도 프로듀서·감독의 권한도 서로 달라 양측 간에 마찰이 일어나기 쉽다”며 “인공지능(AI) 통역 앱으로는 분위기 파악이 안 돼 현장 미팅 때는 서로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에서는 한국 촬영 현장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본은 세부사항을 사전에 정해두는 경우가 많아 마찰이 생긴다는 경험담도 나왔다. 일본 스태프로부터 “바꿀 거면 진작 알려주지”라는 푸념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의 일본판을 만든 제작사 로봇의 고이데 마사키 프로듀서는 “한국에서 한국 스태프와 일할 때는 한국 근로시간 규제가 적용돼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촬영이 곤란했다”며 “창의적인 지점에서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주일 내내 찍는 일본과는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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