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어데고? 빨리 온나, 봐라 뒤에 다 따라온다.”
13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 도시락을 받아 든 어르신들이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무료급식소로 향하는 길이다. 한끼를 챙긴 손이 곧장 다음 한끼를 향했다. 공원에 남은 이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거나 신문을 펼쳤다. 그 사이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장기판이 걷힌 공원의 새 손님이다. 장기판이 떠난 탑골에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든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다.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장기판이 있었다. 북문에선 200원짜리 커피를 팔며 장기판을 빌려주던 이도 있었다. 장군, 멍군 사이로 훈수가 끼어들었고, 술판 과 고성방가, 싸움이 뒤엉켰다.
종로구가 지난해 7월 31일 공원 안팎에서 바둑·장기 등 오락행위와 흡연, 음주가무, 상거래를 금지하면서 판이 걷혔다. 사적(史蹟)의 관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차(車)와 포(包)가 오가던 자리를 이제 도시락과 신문이 채운다.
판을 잃은 노인들은 한동안 종묘광장공원 등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장기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붕 아래로 옮겨갔을 뿐이다. 공원에서 걸어서 5분 남짓, 낙원상가 1층 ‘탑골 어르신 문화놀이터’다. 종로구가 올해 2월 문을 연 66㎡ 공간에 장기·바둑 테이블 17개와 좌석 34개가 놓였다.
문화놀이터 관계자는 “점심시간이 되면 우르르 빠져나가 식사를 하시고, 다시 돌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며 “길거리에서 펼쳐지던 장기판이 이곳으로 완전히 옮겨왔다”고 말했다. 비바람을 맞던 노천의 판이 지붕과 정수기를 얻은 셈이다.
술잔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이날 점심 무렵, 반주 한 잔 곁들이는 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거리 곳곳엔 금주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종로구는 지난해 11월 공원 안팎을 구 1호 금주구역으로 지정했고, 올해 4월부터 음주 적발 시 과태료 10만원을 물린다. 뚜껑 딴 술병을 들고 있거나 술을 다른 용기에 옮겨 마셔도 단속 대상이다. 이날 만난 한 어르신은 “여기서 술 먹고 시비를 건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내쫓긴다”며 “이곳 문화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빈자리엔 낯선 발걸음이 든다. 아내와 신혼여행차 한국을 찾은 크리스(28)씨는 호텔에서 추천을 받아 탑골공원에 왔다. 그는 “탑골공원의 모양새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이국적이고 눈길을 끈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지나쳐 가던 일상이 바다 건너온 신혼부부에겐 이국의 한 장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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