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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막힌 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다 [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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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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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을 이끄는 사람만큼이나 그 조직이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사람도 중요하다. 통일교회 초창기 신앙인 김인철은 남들처럼 목회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는 ‘섭외’의 외길을 걸었다고 회고했다. 섭외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설득의 기술이다. 그의 신앙 역정에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려 한 자세가 담겨 있다.

 

1912년 황해도 재령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부터 일제의 탄압을 겪었다. 서울 경신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한 달간 갇혔고, 학교에서도 퇴학당했다고 회고했다. 숭실전문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한 뒤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해도에서 운수창고업을 했다. 그러나 해방 뒤 북한 공산당에 사업을 빼앗기면서 삶의 터전은 흔들렸다. 전쟁 중 황해도 경찰국장을 맡았던 그는 1·4후퇴 당시 군경이 철수하자 가족을 북에 남겨둔 채 남하했다. 퇴각 길에 자신의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그때 북에 두고 온 가족과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고향과 가족을 잃은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공산주의와 싸우는 삶의 배경이 됐다.

 

1955년 2월, 우연한 기회에 중학교 후배 노정우 교수의 권유로 서울 흥인동의 통일교회를 찾았다. 유효원 초대 협회장의 강의를 일주일 동안 들으며 그 가르침에 심취했다. 의지할 곳 없던 실향민에게 그곳은 “내 집처럼 마음 둘 곳”이었다. 북에 있을 때는 오직 가족만을 잘 건사하기 위해 애썼는데, 이제 나라와 세계에 관심을 둔 새로운 삶으로 들어섰다.

 

입교 뒤에는 인연이 닿아 국영기업체 미창(米倉, 현 CJ대한통운의 전신)에 취직했다. 오랜 친구는 혼자 지내는 그에게 재혼을 권했다. 그러나 북에 일곱 자녀를 두고 온 처지에서 새 가정을 꾸리는 일은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듭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상대도 재혼자이며 기독교 신자여야 한다는 조건으로 소개를 받았다. 상대는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아이를 키우던 이화여대 음악과 출신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새 가정을 꾸렸고 이후 딸을 얻었다. 가족과 생이별한 아픔이 있어 새 가정은 더욱 애틋했다.

 

직장에서는 마산·여수·포항·대전을 거쳐 인천 지점의 중역까지 올랐다. 자동차가 생겼고 양옥집에서 살게 됐다. 주변에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벗도 있었다. 그러나 1960년 8월 문선명 총재의 인류 구제의 뜻에 동참하고자 기꺼이 안정된 기업 중역 생활을 내려놓았다. 가진 재산도 차츰 정리해 교회가 필요로 할 때 헌금했다.

 

그해 10월 통일교 초대 섭외부장에 임명됐지만, 직책이 생계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작은 전셋방으로 옮긴 뒤에는 도둑으로 의심받는 수모도 겪었다. 경찰 조사로 의심은 풀렸으나 방을 비워야 했다. 고정수입이 없어 끼니를 거르고, 전차비가 없어 돈암동에서 청파동까지 걸어 다녔다. 아내가 임신중독증으로 앓을 때는 병원비가 없어 다른 이의 도움으로 입원했다. 7년간 전셋방을 14차례 옮겼다는 기록에는 가족이 함께 견딘 고생이 담겨 있다.

 

그런 형편에서도 그는 사람을 만나고 막힌 일을 풀었다. 13년간 맡았다는 섭외부장의 일은 공동체와 사회 사이에 길을 내는 것이었다. 내부의 열정만으로는 사업과 행사가 성사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그 일을 자신의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섭외 활동은 여러 분야에 걸쳤다. 1959년 인천 주안에서 공기총 제작을 시작하려 할 때 제조허가 신청이 행정기관에서 막혀 있었다. 그는 교섭을 맡아 그해 12월 30일 공식 허가를 얻었다고 증언했다. 예화총포제작소가 출발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이후 이 회사가 통일산업으로 확장되자 초대 사장으로도 일했다. 공기총 제작에는 자주국방을 향한 뜻도 담겨 있었다. 김인철의 증언에 따르면 문 총재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해 사격훈련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 사업을 방위산업으로 키우려 했다. 통일산업은 훗날 군용 변속기와 총화포를 생산하는 방산기업으로 발전했다. 그가 열었던 작은 문이 훗날 한국 방위산업의 한 기반으로 이어진 것이다.

 

1968년에는 국제승공연합의 사회단체 등록을 일주일 만에 성사시켰고, 범종교지 ‘주간종교’의 등록허가도 도왔다. 1800가정 국제합동결혼식의 차량 행렬 허가를 얻는 과정에서는 설득력이 빛났다. 정부가 민심 동요를 우려하자 내무부 장관을 찾아가 국제행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교통신호와 경찰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호소했다. 장관은 타협안을 내놓았고 사흘 뒤 허가가 나왔다고 회고했다. 상대의 우려에 답하며 해결의 길을 연 것이다. 섭외의 힘은 인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받아들일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를 위해 발휘했고, 맡은 일에 정성을 다했다.

 

김인철은 국제승공연합 초대 이사장으로 국내외 승공운동도 이끌었다. 이것은 자유사회의 가치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으며, 고향과 가족을 잃은 아픔을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승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삶에 담긴 자유와 존엄에 대한 신념, 막힌 문 앞에서도 진실과 성실로 설득의 길을 찾은 끈기는 오늘 우리가 되새길 유산으로 남아 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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