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표지 위로 작은 별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수전 톰스의 ‘녹턴’을 주문한 것은 순전히 그 제목과 표지에 마음을 빼앗겨서였다. 해외 원서를 살 때면 으레 서평을 꼼꼼히 살피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번거로운 과정마저 건너뛰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이 책을 펼칠 고요한 밤부터 떠올렸다.
피아니스트이자 저술가인 톰스가 이 책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막스 리히터의 ‘슬립’ 공연을 담은 사진이라고 한다. 객석 대신 침대가 줄지어 늘어선 공연장에서 청중은 누운 채 밤새 음악에 몸을 맡겼고, 깊이 잠든 이들의 곁에서도 연주는 쉼 없이 이어졌다. 저자는 이 몽환적인 풍경에서 출발해 밤의 음악이 걸어온 발자취를 차분히 짚어 나간다.
그 기나긴 계보의 출발점에는 작곡가 존 필드가 서 있다. 19세기 초, 그가 ‘녹턴’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은 피아노 소품들은 저녁의 그윽하고 내밀한 정취를 머금고 있었다. 왼손이 아르페지오로 부드러운 반주를 펼쳐 내면, 그 위로 오른손의 선율이 나지막이 노래를 얹는다. 이런 짜임새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느린 악장에서도 익히 들어온 것이었지만, 톰스가 주목한 필드의 독창성은 오직 그 서정만으로 하나의 온전하고 독립된 세계를 완성했다는 데 있다.
쇼팽에 이르면 그 무구한 평온함에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필드에게서 물려받은 노래의 형식 안으로 깊은 탄식과 불안, 세찬 격정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톰스가 필드의 녹턴을 장미에, 쇼팽의 녹턴을 ‘줄기째 피어 있어서 꺾으려 손을 뻗으면 손가락을 찌를 수 있는 장미’에 빗댄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한없이 아름다운 선율에 홀려 듣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그 이면에 도사린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녹턴은 밤을 안온하게 보내도록 곁을 내어주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칠흑 같은 밤일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마음의 동요를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내가 유독 자주 듣는 곡은 흔히 ‘녹턴 20번’으로 불리는 쇼팽의 올림다단조 소품이다. 영화 ‘피아니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깊은 밤 혼자 원고를 쓸 때면 플레트네프의 연주로 듣곤 한다. 그의 투명하고 부드러운 타건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선율에 마음이 끌린다. 곡이 끝나갈 무렵에는 왼손의 분산화음 반주 위로 오른손의 긴 음계가 넓은 음역을 나비처럼 오르내린다. 톰스가 짚듯, 쇼팽의 장식적 음형은 선율의 표현을 풍부하게 하며, 그 음들을 따라 노래의 여운도 한층 길게 이어진다.
책은 슈만 부부와 비제, 드뷔시와 사티가 남긴 밤의 음악으로도 나아간다. 피아노 음악을 넘어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을 살피고, 회화와 시에 스며든 녹턴의 흔적도 찾는다.
처음 이 책을 주문할 때만 해도 함께 읽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책이 바다를 건너 도착하기까지 보름 남짓 걸렸고, 그사이 우리는 소리 없이 멀어졌다. 책은 내가 고른 모습 그대로 도착했지만, 내 사정은 달라져 있던 것이다. 표지의 별들을 가만히 쓸어보며 은은한 불빛 아래 고궁의 담장을 따라 함께 걷던 밤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날 차 안에서 듣던 녹턴은 우리가 나눈 말들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와 멀어지고 나면 함께한 시간을 끝에서부터 거꾸로 읽기 쉽다. 지나간 말마다 뒤에 벌어진 일의 징조를 찾게 된다. 나는 나중에 찾아온 쓸쓸함으로 그 밤의 다정함까지 고쳐 쓰고 싶지는 않다. 책이 오면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때는 밤이 환하게 다가오곤 했다.
책은 이제 나 혼자 읽는다. 톰스는 가사 없는 음악의 의미가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문득 그 사람의 생각을 묻고 싶어진다. 함께 읽었다면 여기서 무슨 말이 오갔을까. 넘기려던 책장을 잠시 그대로 둔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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