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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책임론까지 소환한 미국 정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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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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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대통령제 정부를 발명하고 유지해 온 미국은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가 유독 활발하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주로 참여해 점수를 매긴 끝에 ‘최고의 대통령’ 그리고 ‘최악의 대통령’을 선발한다. 그런데 매번 최악의 대통령 명단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는 이가 있으니 바로 제31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1929년 3월∼1933년 3월 재임)이다. 그가 취임한 직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난인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발생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국제통화기금(IMF) 개입을 초래한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 비슷한 처지라고 하겠다.

미국 제31대 대통령을 지낸 허버트 후버(공화당). 임기 초인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데 이어 그 수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이란 오명을 얻었다. Hoover Presidential Foundation SNS 캡처
미국 제31대 대통령을 지낸 허버트 후버(공화당). 임기 초인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데 이어 그 수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이란 오명을 얻었다. Hoover Presidential Foundation SNS 캡처

대공황은 1929년 10월 말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갑자기 대폭락하며 시작됐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 시가총액이 뚝 떨어지며 수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치솟은 물가는 서민들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고 일부는 극심한 생활고 끝에 죽음으로 내몰렸다. 공화당 소속인 후버는 경제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에게 참패했다. 오늘날 루스벨트는 이른바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는 반면 후버에겐 ’역대 최악의 무능하고 무기력한 대통령’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후버 덕분에 민주당은 1933년 3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내리 20년간 집권하는 전성기를 누렸다. 공화당은 1952년 대선 당시 앞서 2차대전을 미국 승리로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 뒤에야 비로소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민주당 소속 조 바이든 대통령(2021년 1월∼2025년 1월 재임)은 임기 말 정적인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비난하며 그를 후버에 비유하곤 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2017년 1월∼2021년 1월) 시절 미국 내 일자리가 감소한 점을 들어 트럼프를 ‘허버트 후버 트럼프’라고 부른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1929년에 이은 제2의 대공황이 미국을 업습할 것이란 위기감을 조성한 셈이다.

미국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왼쪽)과 45, 47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바이든은 임기 중 정적 트럼프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허버트 후버에 비유하곤 했다. 오는 11월 연방의회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는 10일(현지시간) 연설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미국은 (후버 임기 도중인) 1929년 같은 대공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P연합뉴스
미국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왼쪽)과 45, 47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바이든은 임기 중 정적 트럼프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허버트 후버에 비유하곤 했다. 오는 11월 연방의회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는 10일(현지시간) 연설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 미국은 (후버 임기 도중인) 1929년 같은 대공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P연합뉴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11월 연방의회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가 급하게 후버를 소환했다. 트럼프는 10일 미 남부 테네시주(州)에서 행한 선거 유세 연설 도중 “만약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여러분(미국인)은 1929년 같은 대공황을 겪게 될 것”이라며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공화당에 투표하는 것뿐”이라고 호소했다. 전임자 바이든의 전략을 그대로 차용한 셈이다. 그런데 바이든은 민주당인 반면 트럼프와 대공황 당시의 후버는 둘 다 공화당 소속 아니던가. 공화당 대통령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같은 당 선배 대통령까지 불러내 이른바 ‘디스’를 가한 셈이다. ‘나한테 유리하다’ 싶으면 뭐든 막 던지는 요즘 미국 정치의 씁쓸한 단면이다. 한국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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