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한국 독립영화의 키워드는 가족과 청년 세대의 고달픔이다. 오래전부터 많은 독립영화가 이 주제를 반복하면서 종종 내가 본 영화가 무엇인지 헷갈리곤 한다. 엇비슷한 영화들 사이에 발생하는 간섭 현상 때문이다. 창작자들이 이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동어반복과 매너리즘은 한국 독립영화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도대체 가족이라는 이 오랜 테마에 어떤 상상력과 도전적인 태도를 더해야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가?
정승오 감독의 영화 역시 이 주제 안에서 작업해 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장편 ‘이장’까지, 그의 영화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현실이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파열하는 순간을 포착해 왔고 이 상황들은 감독 특유의 유머와 위트, 아이러니의 화법 속에서 영리하게 봉합되곤 했다. 최신 장편 ‘철들 무렵’ 역시 이러한 자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시선이 한결 깊어지고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한 단계 성숙한 그의 영화 세계에 반가움을 느낀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세 사람이다. 20년째 별거하면서 이혼하지 않는 아빠 규식(기주봉)과 엄마 현숙(양말복) 그리고 딸 정미(하윤경). 이 3인 가족을 중심으로 아빠 가족의 이야기와 엄마 가족의 이야기가 현재의 양축으로 얹히고, 양가 할머니의 영정 사진과 독백을 통해 과거의 시간이 증언되며, 침묵하는 손주의 시선을 통해 미래의 시간이 어슴푸레한 형상을 드러낸다.
좋은 대학을 나와 운동권에 몸담았지만 지금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아빠. 대책 없는 남편과의 별거를 결정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멋진 집과 커리어를 개척해 온 엄마.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매일의 전쟁을 벌이는 딸. 그러던 어느 날 술 좋아하는 아빠가 암 4기 진단을 받으면서 이 가족에 변화가 몰아친다. 아빠 간병하랴, 오디션 참가하랴 피곤한 딸은 병원에서도 로또를 긁고 있는 아빠가 한심하고, 노모의 구순 잔치를 책임지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 엄마는 딸에게 짐을 지우는 남편이 밉기만 하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가족의 질병과 노모의 구순 잔치라는 이벤트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특별할 것은 없다. 어느 가정이나 한번은 다 겪어야 할 사건이 지금 이들에게 닥쳤을 뿐이다.
그런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자신의 처지 속에서 반응하고 움직인다. 이 정신없는 소동극을 통해 영화는 서로에게 화내고 섭섭함에 눈 흘기고 눈물 흘리면서도 결국 서로 의지하고 건사하는 존재가 가족이라 말한다. 확실히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 힘을 이 가족은 증명한다. 각자의 힘든 시간을 살아내면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분명 힘든 시간이지만 낙관의 기운이 저류에 흐른다. 웃음은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힘이 된다. 모진 시간은 기억되고 수용된다. 그리고 영화는 마침내 ‘새날이 밝았다’며 웃는다. 결국 나의 결단이고 태도의 문제라는 듯이. 그렇지. 결국, 판도라 상자의 맨 아래에 남은 것은 희망이 아니던가.
맹수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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