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경영자로서 기록 남겨
판매, 유통, 대부업도 경영
고리 이자는 양날검이 되어
동학교도의 습격을 받기도
‘남존여비’, ‘삼종지도’, ‘칠거지악’. 우리가 조선시대 여성의 삶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단어들이다. 상상 속 조선시대 여성은 대체로 신분제와 유교의 굴레에 갇힌 가여운 모습이다. 안방에 갇혀 재산권도 없이 남편과 시댁 눈치만 보며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19세기 양반가의 안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충남 홍성 갈산면에 세거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종부(宗婦) 기계 유씨(1818~1875)가 바로 그 반전의 주인공이다. 그녀가 남긴 옛한글 일기이자 가계부 ‘경술일기’에는 지금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조선판 여성CEO’의 재테크 비결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유씨 부인은 과거 준비로 일 년의 절반을 한양에서 보냈던 남편 김호근을 대신해, 가문을 경영했다. 그는 4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연간 30여 차례의 제사를 총괄했다. 손님맞이 역시 그가 지휘했다. 유씨 부인은 가문의 경영자였다.
유씨 부인은 경영 감각이 탁월했다. 진짜 수완은 재산을 불리는 데서 빛을 발했다. 그는 가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면화를 생산했고, 이를 전문 직조인에게 맡겨 고급 면포를 짜게 했다. 이 면포로는 솜씨 좋은 친족 과부를 써서 저고리와 치마 등 의복을 만들어 팔았다. 면화에서 천, 다시 의복으로 이어지는 공정을 몸소 관리하며 부가가치를 높이는 모습은 현대 패션 업체의 CEO와 판박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씨 부인은 유통업에도 수완이 있었다. 집안의 노비 막돌이를 시켜, 한양에 오갈 적마다 안경, 비녀, 가락지, 고급 천 등 사치품을 사들였다. 이를 방문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 보상’을 통해 지방 양반가에 팔았다. 여성 보상은 안채를 드나들며 소매가로 팔았고, 수익률은 원금의 100%에 달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는 대부업을 했다. 급전이 필요한 노비나 평민은 신용도에 따라 2~5냥, 회수율이 높은 친족에게는 10~50냥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융자한 금액만 약 500냥이었다. 또 친족 여성의 잉여금을 받아, 이를 융자하는 ‘알선 중개’도 했다. 은행이 없던 시절, 유씨 부인의 대부업은 지역 속 금융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이자율은 낮지 않았다. 이자율은 ‘5할(50%)’에 달했다. 20냥을 빌려주고 13개월 뒤 이자로 10냥을 받거나, 10냥을 꾸어주고 11개월 후 이자로 4냥 반을 받았다. 당시 법정 금리는 연 20%였다. 이를 감안하면 유씨 부인의 대부업은 초고리대였다.
명분론과 도덕주의가 팽배했던 유교 사회에서 양반가 안주인의 고리 사채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현실적 힘은 결국 자본과 신분에 비롯됐다. 양반들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양반가 남성은 아내의 경제 활동은 모르는 체하며 눈을 감았다. 양반 체면에 해가 안 되는 선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여성에게 강조했던 ‘치산(治産)’도 ‘살림살이’에서 ‘재산 증식’으로 연장되었다. 여성들은 가정을 유지하고, 책무로 주어진 제사와 손님맞이를 완수하려고, 스스로 경제 전략을 모색했다. 그렇다고 해서 법정 이율을 웃도는 고리대를 정당화하기는 어렵겠다. 고리대는 자본가에게 재산 증식의 수단이었지만, 빚진 사람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유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20년 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일었을 때 동학교도가 습격한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씨 부인 집이었다.
‘경술일기’ 속 유씨 부인은 조신한 안방마님과는 거리가 멀다. 면포 생산과 판매용 의복 제작을 총괄했고, 여성 보상을 통해 사치품을 방문 판매했으며, 토지도 매매했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으로 대부업을 했다. 나아가 유씨 부인은 자기 자본과 남편 것을 명확히 구별했다. 일기에는 ‘내 돈’, ‘내 논’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게 나오며, 남편의 자본은 ‘임자 돈’으로 구분했다.
유씨 부인의 ‘경술일기’가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양반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기록이자, 조선 향촌의 경제 금융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의 여성은 그 많은 제사 준비와 손님 접대에 쓰일 비용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했을까?” 종가의 다락방에서 발견된 유씨 부인의 낡은 일기는 이렇게 답을 건넨다. “몸소 돈을 벌어 자본을 늘렸고, 사람들에게 빌려주며 이자를 받았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 총서 7)
김현숙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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