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문장 품고 흐르는 가족의 오늘과 내일
“가족 안에서 개인 행복 추구할 수 있을까 질문”
암 말기 선고를 받은 60대 남자 철택(기주봉)은 아내 현숙(양말복)과 20년째 별거 중이다. 학교장으로 퇴임한 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현숙에게 형제들은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라며 압박한다. 단역배우인 이들의 딸 정미(하윤경)는 아버지 병구완과 오디션을 병행하게 돼 정신이 없다. 생활비도 빠듯한데 아버지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한다.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일까, 스트레스의 근원일까.
가족 해체, 간병, 돌봄. 영화의 재료만 보면 묵직한 가족 드라마가 예상된다. 그런데 정승오 감독의 ‘철들 무렵’(16일 개봉)은 뜻밖의 유머와 활력으로 가득하다. 지난 11일 인터뷰에서 정 감독은 영화의 출발점이 6년 전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생계와 간병을 병행하며 보낸 힘에 부치는 시간을 일기에 기록했고, 이를 영화로 발전시켰다. 정 감독은 “이것이 나에게만, 특정 시기 특정 세대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과거라는 틀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가족 안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역시 여기서 출발했다.
영화에서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는 이는 현숙의 구순 노모 옥남(원미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옥남은 소설가 박완서의 문장을 낭독극에서 읽는다. 옥남의 내레이션으로 박완서의 문장이 흐르고, 그 위로 일제강점기와 민주화운동 시기를 담은 흑백 자료영상이 겹쳐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그 사이로 들어온다.
정 감독은 “박완서 선생 작품에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있다”며 “진중하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날카로움이 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박완서를 흠모했다는 그는 “내 영화도 박완서의 작품을 읽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고 덧붙였다.
철택은 그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캐릭터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힘썼던 86세대 일원으로, 자신의 영달보다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결혼 뒤에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꿈꿨던 가족은 와해됐다. 지금은 변변한 재산도 없이 일용직 노동을 한다. 정 감독은 그를 “원하던 대로 된 것이 거의 없고, 남은 건 암 덩어리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딸 정미에게는 감독 자신의 암울한 경험이 겹친다. 2020년 첫 장편영화 ‘이장’이 개봉했지만 코로나19로 기대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고, 영화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차기작 작업도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투병까지 겹쳤다.
정 감독은 “감독도 배우도, 엄청나게 노력하고 인생을 바치며 (작품을) 준비하지만 돌아오는 건 거의 없는 일이 다반사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깜깜한 시절을 보내지만, 그래도 빛을 보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정미라는 인물을 상상했다”고 돌아봤다.
‘철들 무렵’이라는 제목은 장 폴 사르트르의 ‘자유의 길’에서 가져왔다. “보는 순간 느낌이 딱 왔다”며 “사람들이 마음처럼,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 건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장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마지막 장 제목은 ‘새 날이 밝았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이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갈무리하고 다음을 향해 전진한다. 인생은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을 지나 더러 웃기도 하며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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