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 아내, 거처 옮겨 이혼소송 진행
이혼소장 통해 새 주소 파악…출근 시간 노려
스마트워치로 신고했지만 끝내 참변 못 막아
유족 “필사적으로 숨었는데”…제도 개선 촉구
경기 광주의 한 다세대주택 계단에서 가정폭력을 피해 피신한 아내를 살해한 30대 공무원 사건의 유족이 피해자 보호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경찰은 유족의 의사를 고려해 신상정보 공개는 하지 않기로 했다.
5일 경찰과 유족 등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형사과는 살인 및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혐의로 구속된 30대 남성 A씨에 대한 신상공개 심의위원회를 개최하지 않기로 전날 결정했다. 경찰은 살해당한 30대 여성 B씨의 유가족 의사와 나이 어린 자녀에 대한 2차 피해를 우려해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은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때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 때 신상정보 공개 심의를 열고 공개 여부를 판단토록 정하고 있다. 경찰은 검토를 거친 끝에 심의위 자체를 열지 않기로 했다.
앞서 지난 1일 오전 7시18분쯤 광주시 능평동의 한 다세대주택 계단에서 A씨가 아내인 B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5세 딸이 보는 앞에서 흉기 두점을 B씨에게 수차례 휘두른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경찰에 접수된 112 신고 기록에는 딸의 울음소리와 함께 “엄마, 엄마”를 외치는 음성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가 정서적 아동학대를 한 혐의도 있다고 판단해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도 적용했다.
범행 직후 달아난 A씨는 4시간여 뒤인 오전 11시39분쯤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 한 모텔에서 경찰에 붙잡혔고, 전날 구속됐다. 현직 공무원인 A씨는 경찰에서 “최근 이혼 소장을 받았는데 위자료나 양육비 등 전반적으로 불리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A씨는 이혼소장을 통해 B씨 새 주소지를 파악한 뒤 B씨가 출근하는 시간대를 노려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찾아가 약 15분간 기다렸다가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수차례 경찰에 A씨에 대한 가정폭력 피해를 호소했으며 수원에서 광주로 거처를 옮겨 이혼 소송 절차를 밟아 온 것으로 전해졌다. 사전에 경찰로부터 지급받은 스마트워치로 신고해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경찰은 A씨가 이혼소장을 받은 후 약 3주 동안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고 구체적인 계획과 추가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하고 있다. 다만 A씨가 검거되기 전 휴대전화를 버려 인터넷 검색 기록 등 범행을 사전에 준비한 정황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폭력 피해자 주소가 소송 서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스템의 허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주소 비공개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신청자가 직접 신청하지 않으면 사실상 무용지물인 탓이다.
유족 역시 피해자 보호제도 실효성에 아쉬움을 표했다. B씨 유족은 지난 3일 입장문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감추며 조심했던 고인의 주소가 이혼 소송 과정에서 소장을 통해 노출됐다”며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제도가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돌아봐달라”고 호소했다.
유족에 따르면 B씨는 자신의 위치가 알려질까 두려워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과 블랙박스 영상까지 지우며 필사적으로 숨어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이혼 소장을 통해 주소가 노출되자 가족에게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은 “법적으로 이혼 소송 전 주소 비공개를 위한 별도의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혼 소송을 처음 겪는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제도를 미리 알고 필요한 절차를 하나하나 찾아 신청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스마트워치를 비롯한 신변보호 조치 실효성에 대한 아쉬움도 언급했다. 유족은 “위급한 순간 신고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었다. 범행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다”며 “임시거처 또한 피해자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었다”고 했다. 경찰이 제공한 임시거처가 B씨 직장과 자녀의 어린이집과 멀리 떨어진 데다 외출에도 제한이 있어 기존 일상을 이어가기에 현실적 어려움이 컸다는 설명이다.
이어 “가해자에게 낮은 형이 선고돼 언젠가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된다면,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과연 가해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지 저희 가족은 너무나 두렵다”며 “고인의 죽음이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남지 않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돌아봐 줬으면 한다.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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