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역사는 이름 없이 땀 흘린 평신도들의 삶 위에 세워진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기반을 둔 통일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 성장의 이면에는 젊음과 생업, 때로는 자신의 몸까지 내놓으며 개척에 나선 초기 신앙인들이 있었다. 최주찬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37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난 최주찬은 해방 후 한국으로 건너와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1956년 통일교에 입교한 뒤 성균관대 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그의 청춘은 캠퍼스보다 개척지를 향했다. 대학 3학년을 앞두고 충북 괴산의 농촌으로 개척전도를 떠났다. 변변한 교회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청년들에게 한문과 영어를 가르치며 주민들과 가까워졌다. 그러던 중 낡은 방앗간을 발견하고 교회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서울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가 피를 팔았다. 그렇게 받은 매혈금과 가정교사를 하며 번 학비를 모아 헌 방앗간을 샀다. 지붕에 얹을 볏짚을 구하기 위해 농촌의 타작일까지 도왔다. 피를 뽑아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타작기를 돌리다 손가락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사고까지 당했다. 다행히 손가락을 잃지는 않았지만,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그렇게 마련한 볏짚으로 지붕을 덮으며 첫 교회를 세웠다.
군 복무 후 천안지역 책임자가 된 뒤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학생들이 가져오는 고구마와 감자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빵 장사를 했다. 이후 통일산업에서 생산한 B-3 산탄 공기총 판매에도 뛰어들었다. 자전거에 공기총을 싣고 다니며 판 돈을 모아 천안의 일본식 적산가옥을 구입해 다시 교회로 만들었다. 최주찬에게 교회는 누군가 지어주는 건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벌어, 자신의 손으로 세우는 곳이었다.
그의 삶을 크게 바꾼 것은 바다였다. 선교사 발령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문선명 총재와 함께 참치잡이에 나섰다. 뱃멀미로 고생하면서도 매일 바다에 나갔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 결심을 세웠다. 예수의 어부 출신 제자 베드로처럼 ‘통일가의 베드로가 되자.’ 이후 그의 인생에서 바다는 치열한 사업장이면서 신앙의 현장이 됐다.
1979년 알래스카 코디악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허허벌판에 낡은 통나무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는 약 8개월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버텼다. 그러나 코디악에 ‘하나님의 궁전’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켰고, 마침내 현지 통일교계 수산회사 ISA의 책임을 맡아 사업 기반을 다져나갔다.
혹한 속에서 땅을 녹여가며 수산공장을 건설했고 가공·냉동·수출 체계를 갖췄다. 이후 사업이 계속 성장해 ISA의 전성기에는 합숙 직원만 150명에 이르렀고, 연어 구매센터를 세워 가공한 수산물을 한국과 일본 등으로 내보냈다. 기록에는 한때 연간 수억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는 회고도 남아 있다. 1988년에는 국제 수산사업을 총괄하는 IOE 제2대 회장을 맡아 통일교 수산업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그가 일군 사업의 결실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갔다. 드디어 코디악에 교회를 세우고, 아래층에는 ‘엔젤가든’이라는 유치원을 마련했다. 신앙 공간과 더불어 지역 주민을 위한 자녀 교육 공간을 함께 건립한 것이다. 한국에서 피를 팔아 낡은 방앗간을 교회로 만들었던 청년이 수십 년 뒤에는 알래스카에서 수산업의 기반을 닦고 교회와 교육 공간까지 세운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그는 통일교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1988년 미국 북서부 시애틀 한인회장에 선출된 뒤 한인회관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모금 운동을 벌여 12만5000달러를 모았고, 결국 시애틀 도심 남쪽의 2층 건물을 매입해 한인회관을 장만했다. 그해 시애틀 한인 대표 올림픽위원과 평화통일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최주찬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회고 마지막에는 그 답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세상에 아직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바다의 무궁무진한 자원을 활용해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뜻을 마음에 새겼다. 훗날 알래스카가 인류의 식량난 해결과 세계평화를 위한 두 지도자의 구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오늘날 통일교의 번듯한 외형만 본다면 그 역사의 한쪽을 놓치게 된다. 교회 한 채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피까지 팔고 사업 현장에 뛰어든 청년들이 있었고, 흙벽돌로 움막을 지어 예배당으로 삼아야 했던 개척교회의 애환도 있었다. 최주찬에게 신앙은 말로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교회가 필요하면 직접 세웠고, 사업의 길이 막히면 새로운 길을 냈으며, 한인사회에 회관이 필요하자 약속한 건물을 끝내 마련했다. 그는 ‘수산업 개척자 베드로’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일생의 태반을 바다와 사업 현장에서 보내며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최주찬을 비롯한 이들의 땀과 희생에는 통일교의 성장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던 시대의 개척정신도 함께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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