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인류 역사를 바꾼 ‘銀’밀한 욕망

입력 :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인쇄 메일 url 공유 - +

구글 선호 매체 등록
왕족 신분 과시 수단이던 은 장신구
아메리카 은광 발견 뒤 무역화폐로
유럽 거쳐 아시아 이동하며 세계화
식민지 수탈·노예무역 희생 뒤따라

현대 들어선 전자·의료 소재로 변신
산업계 움직이는 원자재로 ‘존재감’

은, 욕망의 세계/틸만 벤디코프스키/최은희 옮김/오팬하우스/2만2000원

 

금이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동안 은(銀)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하지만 세계사를 돌아보면 은은 결코 ‘금의 아류’가 아니었다. 은화는 시장을 움직였고, 은괴는 대륙과 대륙을 연결했다. 은광을 차지하기 위한 정복과 전쟁이 벌어졌고, 막대한 은의 유입은 세계적인 물가 상승까지 불러왔다. 은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욕망과 함께 근대 세계가 형성된 과정이 보인다.

독일 역사학자이자 역사 프로그램 해설자인 틸만 벤디코프스키의 ‘은, 욕망의 세계’ 는 은을 단순한 귀금속이 아니라 세계사를 움직인 ‘금속’으로 조명한다. 저자가 추적하는 것은 은의 이동 경로인 동시에 인간 욕망의 확장 경로다. 중세 유럽의 왕과 귀족에서 아메리카 광산의 노동자, 대서양을 오간 상인과 노예, 은을 노린 해적과 밀수꾼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역사가 은을 매개로 연결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은에 대한 욕망은 오래됐다. 중세 유럽에서 은은 장식품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은화는 물건을 사고팔고 세금을 내는 화폐였고, 은을 충분히 가진 사람은 토지와 상품을 사거나 병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은광이 발견됐다는 소문만으로 사람들이 광산으로 몰려드는 일도 반복됐다.

당시 은은 왕과 귀족, 부유한 상인들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은으로 만든 식기와 장신구는 신분과 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이후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했고 대규모 채굴에 나섰다. 특히 스페인이 장악한 지역에서 생산된 은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은은 세계를 연결하는 국제적 화폐로 자리 잡았다.

1590년 볼리비아 남서부 포토시 은광의 채굴 현장을 묘사한 판화. 은광에서의 작업은 열악한 환경과 붕괴 위험 속에서 이뤄져 고되고 위험했다. 오팬하우스 제공
1590년 볼리비아 남서부 포토시 은광의 채굴 현장을 묘사한 판화. 은광에서의 작업은 열악한 환경과 붕괴 위험 속에서 이뤄져 고되고 위험했다. 오팬하우스 제공

유럽의 상인들은 상품을 팔아 얻은 은으로 아시아의 비단과 차 등을 사들였다.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이 유럽으로 건너가고, 다시 아시아로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졌다. 은은 아메리카·유럽·아시아의 시장을 연결하는 교환 수단이었다.

저자가 은을 ‘세계화의 금속’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국제금융 시스템이 없던 시대에 은은 국경을 넘어 가치를 전달하는 사실상의 국제화폐였다. 은을 확보한 국가는 세계무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고, 각국은 은의 생산지와 이동 경로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틸만 벤디코프스키/최은희 옮김/오팬하우스/2만2000원
틸만 벤디코프스키/최은희 옮김/오팬하우스/2만2000원

그러나 은의 세계화에는 거대한 희생이 따랐다. 아메리카 은광에서는 원주민들이 강제에 가까운 방식으로 혹독한 노동에 동원됐다. 광석을 캐고 운반하고 제련하는 작업은 위험했고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유럽의 궁정과 상인들이 은의 풍요를 누리는 동안 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수탈이 심화됐다. 은은 대서양 노예무역과도 연결됐다. 아메리카의 광산과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강제로 대서양을 건넜다. 은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경제는 상품뿐 아니라 인간까지 폭력적으로 이동시켰다.

은은 전쟁과 약탈의 역사이기도 했다. 은을 실은 배는 해적들의 표적이 됐고 밀수와 도둑질도 끊이지 않았다. 국가와 권력자들은 은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은은 평화로운 교역을 가능하게 한 화폐인 동시에 전쟁과 폭력을 움직이는 자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은은 왕과 귀족의 공간을 넘어 일상으로 들어왔다. 은화가 널리 사용됐고 숟가락·접시·잔·장신구 등에도 은이 쓰였다. 은은 부와 신분을 상징하는 문화적 의미까지 갖게 됐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은수저’라는 표현에도 이러한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다.

현대사회에서 은의 역할은 다시 달라졌다. 장신구와 식기를 넘어 전자제품과 의료기기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된다. 특히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하는 특성 때문에 첨단산업의 중요한 소재로 평가받는다. 한때 화폐로 세계를 움직였던 은이 이제는 산업을 움직이는 원자재가 된 것이다.

‘은, 욕망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은 자체보다 인간의 욕망이다.

은의 이동을 따라가면 돈과 무역, 제국과 식민지, 노동과 폭력, 그리고 오늘날의 첨단산업까지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은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역할을 바꾸며 여전히 인간의 욕망과 세계경제를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오피니언

포토

한소희 '인형의 등장'
  • 한소희 '인형의 등장'
  • 미야오 안나, '상큼 발랄'
  • [포토] 아이린 '눈부신 등장'
  • 차희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