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종 동식물의 생존전략 들여다봐
버리고 줄이고 멈추며 환경에 적응
강자의 진화가 아닌 유연성에 주목
인간 문명도 ‘몸 밖의 진화’로 해석
극한 진화의 세계/이정모/다산북스/2만3000원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완벽해지는 것만이 진화는 아니다.” 심해와 극지, 사막, 화산섬처럼 인간에게는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에도 생명은 존재한다. 400도에 가까운 열수가 솟아나는 곳에 사는 폼페이웜부터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물곰, 화산섬에서 꽃을 피우는 오히아 레후아까지. 이들은 생존을 위해 때로는 눈을 없애고, 호흡을 멈추며, 몸집을 줄이고, 먹이마저 포기한다.
과학스토리텔러 이정모가 펴낸 ‘극한 진화의 세계’는 심해와 극지, 사막, 화산섬, 강과 호수, 그리고 인간이 만든 도시까지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26종의 동식물을 통해 진화의 진짜 의미를 들여다본다. 책이 보여주는 진화는 ‘강자의 진화’가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자신을 끊임없이 바꾸는 생명의 유연성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극지는 심해(深海)다. 빛 한 줄기 닿지 않고 엄청난 수압이 짓누르는 바닷속은 인간에게 죽음의 공간이지만, 수많은 생명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대표적인 생물이 폼페이웜이다. 갈라파고스 열곡대 중앙해령의 수심 약 2500m, 열수분출구 주변에 사는 이 생물은 뜨거운 물과 극심한 압력을 견디며 살아간다. 1977년 미국 심해잠수정 앨빈호가 심해를 탐사하면서 인간은 햇빛 없이도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심해 생물의 모습과 생존 방식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배럴아이’로 불리는 마크로핀나 미크로스토마는 머리 위쪽이 투명한 막으로 덮여 있어 그 안에 있는 관 모양의 눈을 외부에서 볼 수 있다. 이 눈은 평소에는 위쪽을 향하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앞쪽으로 회전한다. 빛이 거의 없는 수백~수천m 깊이에서 위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먹잇감을 찾기 위한 진화적 적응이다.
초롱아귀의 번식 방식은 더욱 극적이다. 심해에 사는 수컷은 암컷보다 훨씬 작으며, 암컷을 찾아내면 몸에 달라붙어 피부와 혈관까지 융합한다. 이후 수컷은 독립적인 생활 능력을 잃고 암컷에게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정자를 제공하는 번식기관처럼 살아간다. 짝을 만날 기회가 극히 적은 심해에서 어렵게 만난 암수가 다시 헤어지지 않고 지속해서 번식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다.
벨처바다뱀은 또 다른 적응의 사례다. 바다에서 살아가지만, 아가미가 없어 폐로 호흡한다. 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긴 폐에 공기를 저장해 장시간 잠수하지만 결국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와야 한다. 바다에 적응하면서도 육상 척추동물의 흔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셈이다.
극지와 고산지대로 가면 생존 전략은 더욱 다양해진다. ‘물곰’으로 불리는 완보동물은 극심한 건조나 추위 같은 환경에서 몸의 대사활동을 크게 낮추고 휴면 상태에 가까운 형태로 버틴다. 생명이 반드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는 사례다.
사막에서는 ‘적게 쓰는 능력’이 생존의 무기가 된다. 사막여우는 작은 몸집으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커다란 귀로 체온을 조절한다. 더 크고 강한 몸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환경에 필요한 만큼만 갖추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열대우림과 외딴섬에서는 고립과 위장이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된다. 사탄잎꼬리도마뱀붙이는 마른 잎을 빼닮은 몸으로 주변 환경과 자신의 경계를 흐린다.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존재감을 지우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타이탄 아룸은 썩은 시체와 비슷한 냄새를 풍겨 파리 등 곤충을 유인한다. 인간에게 불쾌한 냄새가 생물에게는 번식을 위한 중요한 수단인 셈이다.
책은 말미에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특별히 강한 존재가 아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강력한 이빨도, 빠른 속도나 날개도 없다. 대신 인간은 옷과 집, 불과 도구, 문자와 과학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이를 인간의 ‘몸 밖의 몸’으로 바라본다.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집은 둥지의 확장이며, 불은 위장의 확장이다. 도구는 손과 이빨을 대신하고, 책은 기억을 확장하며, 과학은 인간의 감각을 넓힌다. 약한 몸을 문명과 상상력으로 보완한 인간은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이 됐다.
하지만 인간의 성공은 다른 생명에게 새로운 ‘극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기후변화로 서식지를 잃어가는 북극곰, 인간의 필요에 맞춰 몸과 생태가 바뀐 돼지, 인간의 선택과 취향에 적응한 개와 고양이가 그 사례다. 인간이 만든 도시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가 됐고, 그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인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저자는 “진화에는 정해진 목적지가 없다”고 말한다. 더 크고 강하고 복잡해지는 것이 진화의 방향도 아니다. 어떤 생명에게는 감각을 잃는 것이, 다른 생명에게는 몸집을 줄이는 것이, 또 다른 생명에게는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최선의 생존 전략이다. 38억 년 동안 지구 생명이 이어져 온 비결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뜻밖의 위로를 건넨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더 강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때로는 무언가를 버리고, 줄이고, 멈추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생존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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