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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년 돌을 걷어낸 자리… 땅속에 펼쳐진 거대한 콜로세움 [남정탁 기자의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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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남정탁 기자 jungtak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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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는 매일 수많은 순간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독자와 만나는 사진은 그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취재 현장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와 스쳐 지나간 순간, 그리고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한 인상적인 풍경까지. 뉴스 사진 뒤에 남겨진 이야기와 우리의 일상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을 사진기자의 시선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진 한 장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전북 익산의 너른 평야 한가운데 거대한 회백색 구멍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절벽이 땅속으로 깊숙이 떨어진다. 층층이 잘라낸 암벽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관중석을 닮았다. ‘한국의 콜로세움’이라 불릴 만한 풍경, 익산 황등석산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규모가 더욱 선명하다. 수백m에 걸쳐 펼쳐진 채석장은 지하 약 100m까지 내려간다. 바닥 면적만 축구장 9개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작업로와 바닥에 놓인 중장비마저 거대한 공간 속에서는 장난감처럼 작아 보인다. 거대한 경기장을 땅속에 거꾸로 파 놓은 듯하다.

 

이 기묘한 풍경은 오랜 채석이 만든 결과다. 황등석산에서 본격적으로 돌을 캐기 시작한 것은 조선 철종 때인 1858년으로 알려져 있다. 170년 가까이 이어진 채석으로 당시 해발 100m 남짓했던 화강암 산은 모습을 감췄고, 채석은 다시 지하 깊숙이 이어졌다. 산 하나가 있던 높이에서 지금의 채석장 바닥까지, 사람이 돌을 걷어내며 땅의 단면을 드러낸 셈이다. 

 

이곳에서 캐낸 화강암이 ‘황등석’이다. 밝은 회백색을 띠며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한 데다 철분 함량이 적어 변색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 등 오래된 석조문화재부터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영빈관, 독립기념관 등 우리에게 익숙한 건축물에도 황등석이 사용됐다.

 

가까이 다가서면 오랜 채석의 흔적이 더욱 또렷해진다. 수십m 높이의 회백색 암벽에는 돌을 반듯하게 잘라낸 흔적이 가로세로로 이어진다. 거대한 돌을 한 장 한 장 이어 붙인 성벽 같다. 암벽에는 빗물이 흘러내린 검은 자국이 길게 드리웠고, 돌 틈에는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사람이 만든 직선 위에 자연의 시간이 다시 쌓이고 있다.

 

오랫동안 돌을 캐던 산업현장이었던 황등석산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채석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시설과 산책로 등이 들어서면서 거대한 채석장의 풍경 자체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전망대에 선 방문객들은 발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석벽을 휴대전화에 담는다.

 

이곳에서 꺼낸 돌은 전국 곳곳으로 흩어져 건축물이 됐다. 돌이 떠난 자리에는 거대한 회백색 절벽과 깊은 공간이 남았다. 층층이 깎인 석벽에는 황등석산이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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