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소련, 베트남 등 세계 곳곳의 역사적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90). 그가 유독 오랫동안, 집요하게 기록한 곳이 한국이다. 1960년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60년간 100여 차례 한국을 오가며 남긴 사진만 약 10만 컷. 청계천 판잣집, 동두천 미군 기지촌, 베트남 파병, 거리의 시위대, 공장 노동자 등 한국 사회가 애써 감추거나 외면했던 풍경까지 그의 카메라는 비껴가지 않았다.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연출 고희영)이 2일 개봉한다.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에서 만난 구순의 사진가는 자신의 삶과 사진을 다룬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며 “주인공은 내가 찍은 사진들”이라고 강조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962년 일본 미나마타에서 미나마타병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름을 알렸다. 사회가 외면하려는 현장을 카메라로 증언하는 작업은 이후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1960~70년대 한국에선 외국인 사진가라는 신분이 때로 취재의 문을 열어줬다. 그는 “당시 한국 사진작가나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감시를 심하게 받았고 검열도 엄격했다. 시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며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다”고 돌아봤다. 그렇다고 촬영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취재 때마다 중정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박정희 정권 아래 한국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일본인이라는 사실도 걸림돌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일본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그가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개새끼’, ‘쪽발이’였다.
청계천 판자촌을 찍을 때는 한국인 동료들까지 “한국의 가난한 모습을 찍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청계천이 복원되자 그를 만류했던 기자가 오히려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겨 주었다”고 감사함을 표했다고 한다. 그에게 광주는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경북 문경에서 도자기를 촬영하고 있었다. 깊은 산 속이어서 외부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뒤늦게 광주의 상황을 전해 들었지만, 차편을 구하지 못해 현장에 갈 수 없었다. 그는 “훗날 소련 붕괴 때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현장을 촬영한 것으로 그 아쉬움을 조금은 만회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북한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는 “한때는 남북통일 순간을 찍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북의 사고방식과 경제발전 차이가 너무 커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보며 정말 놀랍고 기쁘다”며 “한국의 고도성장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피, 땀, 눈물”이라고 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그는 한국인 아내 최화자(82)씨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구와바라가 한국을 취재하다 만난 인연으로, 올해로 56년째 해로하고 있다. 최씨는 75세까지 일을 하며 가계를 꾸리고 남편의 사진 인생을 뒷받침했다. 아내 이야기가 나오자 사진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고맙다”며 웃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아메리카호(湖)](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8/31/128/20260831519348.jpg
)
![[김기동칼럼] 관행이 헌법을 앞설 순 없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8/31/128/20260831519342.jpg
)
![[기자가만난세상] 기후위기 시대의 스포츠](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2/18/128/20260218510779.jpg
)
![[김태웅의역사산책] 조선의 소와 아이들을 그린 이중섭](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8/31/128/20260831519317.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