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와 통제가 공존한 조선 속 작은 일본
돌담과 사형 처벌로 가로막힌 경계의 공간
온천 구경부터 밀무역까지 위험 무릅쓴 ‘난출’
동래 민가를 드나들며 이어진 은밀한 만남과 사건
담장 너머의 세상과 자유를 열망했던 사람들
왜관의 일본인들은 왜 담장을 넘었을까
이제는 다소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우리 모두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낯선 시간을 지나왔다. 확진 판정을 받거나 해외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집이나 별도의 공간에 머물러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창밖에는 평소와 같은 일상이 펼쳐지는데 정작 그곳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경험은, 자유롭게 문밖을 나서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그런데 300여 년 전 조선의 부산에는 이러한 일상의 자유를 훨씬 오랫동안 제약받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이다.
조선 속 작은 일본, 왜관
왜관의 역사는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포·제포·염포 등에 설치된 왜관은 임진왜란으로 조일 관계가 단절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국교가 재개되면서 1607년 부산 두모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됐고, 1678년에는 오늘날 용두산 일대의 초량으로 이전했다.
초량왜관은 약 33만㎡ 규모로, 보통 400~500명, 많을 때는 1000여 명의 대마도 출신 성인 남자가 생활했다. 일본인들이 조선과 외교하고 무역하며 생활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왜관은 교류의 공간인 동시에 통제의 공간이었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은 일본인의 움직임과 조선인과의 사적인 접촉을 경계했다. 왜관 주변에는 군사들이 배치되었고, 1679년에는 금표를 세웠으며, 1709년에는 토담을 약 1.8m 높이의 돌담으로 개축했다.
일본인이 정해진 목적과 절차를 벗어나 왜관 밖으로 나가는 행위를 ‘난출(闌出)’이라 했다. 필요한 경우 출입이 허용되었지만 마음대로 경계를 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됐다. 1683년 조일 양국의 약조에서는 이를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그럼에도 난출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 대일관계의 사례를 정리한 『변례집요』에는 아예 ‘난출’이라는 별도의 항목이 마련되었을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담장 밖으로
그렇다면 그토록 엄한 처벌에도 일본인들은 왜 담장 밖으로 나갔을까.
1672년 어느 날,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 14명이 무단으로 나와 온천으로 향했다. 이들은 목욕을 마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언덕에 올라 주변을 내려다보고 강변을 거닐며 구경했다. 조선인 통사가 제지하자 막대기를 휘둘러 그를 쫓아버렸다. 당시 조선인 관리는 이를 두고 “이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적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온천에서 목욕하고 주변을 구경한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싶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게는 국가 간에 합의한 경계를 무단으로 넘어선 중대한 일이었다. 더욱이 난출은 단순한 ‘나들이’에 그치지 않았다. 경계를 넘은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밀무역을 하거나, 때로는 조선인 여성과 은밀히 정을 통하는 일도 있었다.
1675년 동래에서는 한층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다. 동래 사람 어부동이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한 일본인을 죽여 바다에 던진 것이다. 당시 기록에는 일본인들이 몰래 민가를 드나들며 부녀자들과 어울렸고, 동래와 부산 일대에 일본인의 자녀가 태어나는 사례도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정부는 왜관의 경계를 통해 일본인의 이동뿐 아니라 상품과 정보의 흐름, 조선인과 일본인의 사적인 만남까지 관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은밀한 왕래는 사라지지 않았다. 1787년에도 서일월이라는 여성이 여러 차례 왜관을 드나들다 적발됐다.
이처럼 경계를 넘은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경제적 이익이나 개인적인 만남을 좇는 경우도 있었다.
담장 너머를 바라본 사람들
왜관은 역설적인 공간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만나기 위해 만든 곳이면서도 서로 함부로 만나지 못하게 만든 곳이었다. 조선 정부에게 왜관의 담장은 안전과 외교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경계였다. 반면 일본인들에게 담장 너머는 눈앞에 보이지만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왜관은 가까이 있으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300여 년 전 왜관의 생활을 우리가 경험한 ‘낯선 시간’과 그대로 견줄 수는 없다. 다만 담장 너머의 자유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 저마다의 이유로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 만나고자 했던 마음만큼은 오늘날의 우리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21)
김성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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