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 둔 증권맨, IMF 때 보증 잘못서 빚더미 앉아
이혼 후 가족과 단절… 각종 질병에 밥벌이도 끊겨
병원서 만난 사회복지사 통해 수급자·파산 등 신청
지금은 비슷한 처지 남성 도와… “혼자 버티지 말길”
두 딸을 둔 박범선(56)씨는 십수 년 전까지 증권가에서 일했으나 홀로 고립에 빠졌다. 박씨의 삶이 한순간에 ‘뒤집힌 배’가 된 건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 때 떠안은 빚이 첫 균열이었다. 실직과 이혼, 가족 단절은 그 틈을 더 넓혔다. 건강 악화는 이미 기울어진 배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오래 버텨냈지만 배 안으로 차오르는 물을 혼자 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40도에 육박하는 ‘극한 폭염’이 기승을 부린 6일 서울 마포구의 10평 남짓한 박씨의 빌라를 찾았다. 집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설치 비용이 아깝다며 에어컨도 예전 집에 두고, 길에서 주워 온 선풍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5번씩 찬물로 샤워하며 무더위를 이겨냈다.
박씨는 지난날에 대해 “후회스러운 순간이 많다”고 했다. 도움을 구할 줄 모른 채 고립에 잠긴 그는 이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돕는 봉사자가 됐다. 고립사 사망자 중 절반이 넘는 중장년 남성, 그들을 위해 박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채무·단절·실직… 몸이 못 버텼다
대전상고(현 우송고)를 나온 박씨는 졸업반이던 1987년 대신증권에 취업한 ‘증권맨’이었다.
대전지점에서 시작해 군 전역 뒤 서울로 올라왔고, 1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했다. 1995년 결혼해 이듬해까지 두 딸을 얻은 박씨는 하루하루 충실히 일하며 미래를 그려나간 가장(家長)이었다.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97년 IMF 사태 때다.
관행처럼 이뤄진 연대보증이 발목을 잡았다. 지인 부탁을 받은 직장 상사가 “내가 1억원 보증할 테니 너는 5000만원만 해라”라는 식의 연대보증이 흔한 때였다. 박씨가 실제 빌린 돈은 4000만원 수준이었으나, 다른 20여명의 채무자 몫까지 떠안아 빚은 6억원가량으로 불어났다. 박씨는 “치솟는 금리 탓에 증권사와 기업들이 도산하는 상황에서 나도 함께 무너졌다”며 “집에 압류가 들어와 빨간 딱지가 붙었다”고 회상했다.
대신증권을 나온 뒤에도 일을 놓지 않았다.
투자상담, 헤드헌팅 업체, 카드·대출 영업 등 여러 일을 거쳤다.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은 줄지 않았다. 대출 이자율만 20%에 달해 채무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막대한 빚에 박씨는 아내와 이혼을 택했다. 빚을 홀로 책임지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2∼3년 뒤 아내와 관계도 멀어졌다. 두 딸을 한동안 직접 양육했으나, 한계를 느낀 그는 첫째가 10살 무렵이 됐을 때 아이들을 엄마에게 보냈다. 고립으로 향하는 길목, 가족과의 단절이 시작됐다.
완전히 사람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일을 거듭하며 집 밖으로 나갔고, 사람도 만났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은 단기 일자리마저 어렵게 했다. 고시 공부를 하던 사촌의 이름을 빌려 잠시 일하는 등 불법적인 방법도 택할 만큼 절박했다. 그렇게 박씨는 또 다른 고립의 요소, ‘실직’의 경계선을 오갔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두 딸과의 왕래마저 끊긴 뒤 외로움과 스트레스가 겹치며 몸도 마음도 서서히 닳았던 것이다. 당뇨병과 심장질환이 겹쳤다. 치아도 하나둘 빠졌다. 전체 틀니가 필요했지만, 치과에 갈 돈도 없었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 옆 자선의료기관인 요셉의원에서 치료받았고, 틀니를 하는 데 1년이 걸렸다. 183㎝에 70㎏대였던 몸무게는 한때 54㎏까지 빠졌다. 몸이 더는 일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완전한 실직 상태가 됐다.
초라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반복되자 연락도 줄었다.
소문이 날까 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까 봐, 자신이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야 할까 봐 사람을 피했다. 박씨는 “이가 아프고 여러 병에 걸려 고통스럽고 지쳤다”며 “누군가에게 연락하기도 초라해 스스로 깊은 어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고립의 시간은 고시원에서 깊어졌다.
2평 남짓한 방은 좁았다. 조리시설은 공용이었다. 고시원에는 밥과 김치가 있었지만, 치아가 망가진 박씨에게는 그것도 쉬운 식사가 아니었다. 양은냄비에 물과 밥, 김치를 넣어 김치죽처럼 끓여 먹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하루 네 갑을 피우던 담배는 줄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박씨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몰랐다. 2000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됐는데 이런 복지 체계가 자신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빚이 늘 그를 옭아맸지만 파산제도도 몰랐다.
그는 “우리 세대는 남한테 의지하고 그런 세대가 아니었다”고 했다. 돈은 벌어서 해결해야 하고, 무너지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배워온 세대였다. 구조 신호를 보낼 줄 몰랐다. “차라리 굶어 죽고 말지, 남한테 의지한다는 생각은 잘 못했어요. 내가 무너지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복지제도라는 게 나한테 해당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죠.”
◆쓰러지고 알게 된 ‘제도’
구조 신호를 보낸 건 버티지 못한 그의 몸이었다.
심장 기능이 약해지면서 폐에 물이 찼다. 2018년 호흡곤란으로 쓰러진 그는 구급차에 실려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갔다. 대형병원 응급실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던 박씨는 인근 2차 병원인 성애병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병원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그제야 처음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을 알게 됐다. 파산제도도 그 무렵 알았다. 그의 나이, 48세 때다.
퇴원 후 수급자가 됐다. 파산 신청도 했다. 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바닥이 생겼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생기자 “먹고살 수는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주거급여는 당장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줄여줬다.
고시원비를 못 내면 짐을 싸야 했던 시간, 내일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던 순간들, 병원비 때문에 치료를 미뤄야 했던 날들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회복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내일도 잠잘 곳이 있고, 굶지는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었다.
도움받는 일은 여전히 편하지만은 않았다.
박씨는 “공짜로 돈을 받는 게 죄스러웠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마음이 그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자신이 알게 된 복지제도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다. 수급 신청, 주거지원, 파산 절차를 알아봤고, 고시원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법을 알려줬다. 고시원에는 박씨와 닮은 사람들이 방마다 있었다. 아파서 일을 못하는 사람, 빚 때문에 숨어 지내는 사람, 제도를 몰라 버티는 사람. 박씨는 자신이 겨우 붙잡은 구명줄을 다른 사람에게도 건넸다.
그 일은 복지관 활동으로 이어졌다. 교육을 받고 봉사와 상담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박씨는 서울시 고립·은둔 예방 사업인 ‘치유활동가’ 1기로 활동하고 있다. 고립 경험자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경우 기관과 연결하는 일이다. “공무원이나 전문가가 가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니까 뭔가 통하는 게 있어요. 나도 그랬다, 나도 몰랐다, 나도 버텼다….”
◆“도움이 먼저 닿기를”
문밖으로 나섰다고 박씨 삶이 완전히 편안해진 것은 아니다.
심장질환과 당뇨는 여전히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올해 2월 심장에 스텐트 삽입 시술을 받았다.
높아진 물가와 월세 비용 탓에 현재의 수급비와 주거급여로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하다. 수년간 보증금 90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서울 마포구 빌라에서 거주하던 그는 집주인이 월세를 “두 배로 올리겠다”고 통보하자 이사해야 했다. 지난달 보증금 1억3000만원에 월세 25만원인 10평짜리 방을 인근에서 구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추가로 4000만원의 대출을 받았다. 매달 60만원이 넘는 고정 비용이 나간다. 박씨는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더해 100만원가량을 받는다.
TV를 틀고 잠이 드는 습관은 고시원 생활부터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몇 시간짜리 바둑 방송을 그냥 켜놓는다. 적막함을 깨고 무슨 소리라도 들려야 불안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기자전거를 타는 취미로 조금씩 활력을 얻고 있다. 과거와 가장 달라진 것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게 됐다는 점이다. 남은 생은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왜 도움을 구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문득 밀려올 때가 있지만, 어제를 고통스러워하기보다 내일을 기대하기로 했다.
“조용한 암살자처럼 심장마비가 언제 올지 모르잖아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얼마를 더 살든 남은 생은 즐겁게 살고 싶어요. 자전거로 이곳저곳 여행하고 싶습니다.”
사회에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박씨는 “제도가 먼저 찾아와주고 보살펴주는 사회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씨가 병원에 실려 간 뒤에야 복지제도를 알게 된 것처럼, 많은 고립·은둔 중장년 남성은 거의 침몰하기 전까지 자신이 도움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은 오늘도 방 안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다. 그 침묵을 종종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우리는 오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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