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중국 선양을 출발해 상하이로 가던 민항기가 갑자기 항로를 바꿨다. 승객 가운데 6명이 조종사 등을 협박하고 비행기를 납치한 것이다. 하나 대만으로 향하려던 민항기는 연료가 부족해 강원 춘천의 주한미군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미수교 상태로 서로를 ‘중공’(中共), ‘남조선’(南朝鮮)이라고 각각 부르며 경원시했다. 그러나 사태를 수습하려면 양자 간의 대면 접촉이 불가피했다. 결국 중국 대표단이 한국을 찾아 교섭을 벌였다. 납치범 및 탑승자들의 신병 처리에 관한 합의 내용이 담긴 각서를 작성하며 중국은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란 정식 국호로 명기했다.
1989년 출범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의 3차 회의는 1991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됐다. 지금과 같은 정상회의는 아니고 회원국들의 외교·통상 분야 장관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중국과 대만 둘 다 회의 참가를 바라는 가운데 우리 외교부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중국 말고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부르면서 국가로 인정하고 돈독한 외교 관계도 맺고 있었다. 이에 중국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일 뿐”이라며 “만약 대만 외교부장이 회의에 함께한다면 우리는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대만은 외교부장 대신 진수지(金樹基) 주한 대사가 에이펙 회의에 참석하는 방향으로 양보를 했다.
노태우정부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동서 냉전의 완화 조짐에 힘입어 북방 외교에 주력했다. 북한하고만 수교한 공산주의 국가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였다. 1990년 9월 소련(현 러시아)과의 외교 관계 수립은 그 백미(白眉)에 해당했다. 한국이 또 다른 공산권 대국인 중국과의 물밑 접촉에 나선 사실은 대만도 잘 알고 있었다. 1988∼1990년 외교부 아주(亞洲)국장을 지낸 이재춘 전 주(駐)러시아 대사는 회고록에서 국장을 그만두고 대만을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한·중 수교가 임박한 가운데 대만 측의 간절한 로비를 받는 심경이 불편했다’는 취지로 기술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34년 전인 1992년 8월24일 중국 베이징에서 당시 이상옥 외교장관과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만나 양국의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한국과 단교(斷交)가 불가피해진 대만에선 혐한(嫌韓)의 함성이 쏟아짐과 동시에 한국 상품 불매 운동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이는 양국의 국교 수립이 우리 경제와 남북 관계에 미칠 긍정적 영향에 들뜬 목소리에 파묻혔다. 최근 방한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남북을 일컬어 “두 개의 서로 다른 국가”라고 불렀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논리에 적극 동조한 셈이다. 한·중 수교가 남북 관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던 기대는 점점 식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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