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생존자 공동체 5년의 기록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고 법적 다툼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사회적 관심이 잦아든 자리에서 몸을 돌보고, 관계를 다시 맺고,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데뷔작 ‘버블 패밀리’(2018)로 주목받은 마민지(사진)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착지연습’은 무용·영화·출판·미술계 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들이 만든 공동체 ‘상-여자의 착지술’의 5년을 따라가며 그 시간을 기록했다.
‘착지연습’은 ‘상-여자의 착지술’ 구성원들이 2020년부터 예술을 매개로 회복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해온 과정을 담았다. 구성원들은 몸을 쓰러뜨려 눕거나 바닥을 기는 등 몸을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몸의 감각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몸을 지지하며 안전한 거리와 관계를 경험한다.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으며 다음 달 10일 서울 마포구 인디스페이스에서 단관 개봉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난 마 감독을 23일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만났다.
마 감독이 ‘상-여자의 착지술’ 기획을 시작한 것은 2019년이었다. 미투 운동과 문화예술계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싸움의 시간을 거친 마 감독은 ‘그다음’을 고민했다. 관련 연대 활동에서 만난 예술인들과 생존자를 위한 회복 프로그램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는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의미화한 책 ‘여자를 일으키는 여자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5년 동안 마 감독의 위치는 공동체의 기획자이자 참여자, 이들을 기록하는 감독으로 복합적이었다. 마 감독은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촬영감독에게 앵글을 지시하고 손짓이나 문자로 촬영을 조율하기도 했다”며 “제가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시선을 더 깊이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의 일상 회복을 다룬 영화지만 각자가 언제,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관련 영상도 있었지만 마 감독은 “그것을 영화에 전혀 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사건의 세부를 보여주지 않아도 그 이후의 삶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를 재현하는 대신 그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택한 시선이다.
‘착지연습’이라는 제목은 트라우마 치료에서 쓰이는 ‘그라운딩(grounding)’에서 가져왔다. 불안·공황이 찾아왔을 때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을 통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는 방법이다. 마 감독에게 ‘착지’는 단순히 몸을 바닥에 내려놓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다시 존재하는 연습”이다.
그러나 회복은 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기 힘들 만큼 무너져 입원하는 구성원이 있고, 여러 사정으로 공동체를 떠나는 구성원도 있다. 영화는 그런 부침과 이탈까지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계는 남는다. 늘 그 자리에서 서로를 기다리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마음을 쓰는 관계다.
5년 사이 공동체가 마주한 문제도 달라졌다. 최근에는 디지털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힘썼다. 기존 성폭력 피해와 양상이 달라 원점으로 돌아가 연구해야 했다. 각자의 작업을 이어가는 예술가들이 모인 공동체인 만큼 앞으로 무엇을 함께할 것인지도 다시 묻고 있다. 마 감독은 지금을 “공동체의 방향을 재정립하려는 시기”라고 했다.
‘착지연습’ 개봉은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 감독이 직접 나서는 ‘셀프 배급’으로 진행한다. 여러 배급 지원 사업에 지원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원 사업에 매달리는 대신 직접 개봉을 택한 이유에 대해 마 감독은 “생존자들의 부고가 계속해서 들려오기 때문”이라며 “무조건 빨리 개봉해 이 영화를 필요로 하는 관객에게 닿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마 감독은 ‘착지연습’을 “대중성 있는 영화라기보다는 필요한 관객들이 너무 분명하게 존재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오는 11월부터는 공동배급사와 함께 단체 관람과 공동체 상영, 지역 상영 등으로 관객과의 접점을 넓힐 예정이다. 마 감독은 “관객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구루마를 끌고 찾아가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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