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살해된 막내 생일에 뭉친 가족
출소한 ‘그놈’ 트렁크에 싣고 경주행
비극의 피해자 벗어나 복수극 공식 깨
제작자·감독·주연 모두 여성으로 합심
金 감독 “내게 제작은 살풀이 가까워…
매드맥스 같은 영화 만들어보고 싶다”
“대단히 비효율적인 복수극이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경주기행’의 김미조(37)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8년 전 경주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한 남자에게 살해된 막내딸 경주의 생일. 엄마 옥실(이정은)과 세 언니 장주(공효진), 영주(박소담), 동주(이연)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놈’을 봉고차 트렁크에 싣고 경주로 향한다. 여행은 알리바이, 목적은 복수다.
그러나 영화는 치밀한 복수극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은 네 모녀는 군대처럼 한마음으로 움직이기는커녕 각자의 방향으로 좌충우돌한다. 여행이 이어질수록 균열은 깊어진다. 엄마의 오른팔인 ‘K장녀’ 장주, 냉철한 전략가 영주, 무대포 성격의 프로레슬러 출신 동주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벌레 한 마리에 호들갑을 떨고, 범인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복수의 비장함보다 우스꽝스러움이 앞선다.
김 감독은 “가족이란 집단이 얼핏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같지만, 현미경으로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마음은 엄청나게 다르다”며 “숨겨왔던 마음을 드러내면서 집단이 깨지고,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 속 네 모녀는 묻지마 범죄로 가족을 잃은 ‘비극의 피해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는다. 대신 각자 욕망과 성격을 가진 인물로 살아 움직인다.
김 감독이 이 이야기를 처음 떠올린 것은 2014년 가족과 경주를 찾았을 때다. 우비를 입고 대릉원을 걷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창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진 경주에서 낮에는 햇볕이 쏟아지다가 저녁이면 비가 내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겪으며 ‘이곳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떠올렸고, 점차 이야기를 키웠다.
그가 특히 관심을 둔 것은 비극 자체보다 그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실제 유가족 심리상담 전문가 등을 찾아 자료 조사를 한 결과, 유가족이 직접 복수를 감행하는 사례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을 묻어두려는 것이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용서가 아니라 끝까지 가야만 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옥실은 그런 질문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김 감독은 “고도로 훈련된 살인 병기가 아니라 절대 (복수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해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중년 여성이고, 힘도 세지 않으며, 과거의 트라우마와 딸들을 짊어진 옥실이 복수를 선택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탐구한 것이다. 옥실 역에는 영화 구상 단계부터 이정은을 염두에 뒀다. 대학로 시절부터 그의 연기가 지닌 감정적 울림과 깊이를 동경해왔다는 설명이다.
비극을 다루면서도 영화가 유머를 잃지 않는 데는 감독 자신의 가족사가 배경에 있다. 그는 “아버지가 굉장히 유머러스한 분”이라며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어도 가족 전체가 많이 웃는 편인데, 나 역시 아버지에게서 그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영화는 잔혹한 범행 장면을 직접 보여주기보다, 복수하러 가는 길에도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사고를 치는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이런 사랑스러운 가족에게 이런 아픈 일이 있었다”는 마음으로 관객이 가족을 응원하게 하고 싶었다.
김 감독은 자신의 실제 가족도 영화에 투영했다고 했다. 네 자매 중 막내인 그는 첫째 언니의 ‘엄마를 만족시키고 싶다’는 K장녀 특유의 강박, 둘째 언니의 냉철함, 셋째 언니의 프로레슬러 경력을 영화 속 자매들에게 나눠 담았다. 그렇기에 영화는 복수극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다채로운 모녀 서사가 담겼다. “엄마는 딸들 수만큼 얼굴이 다양하다”는 김 감독의 깨달음이 영화 속 캐릭터 묘사로 이어진 결과다.
60대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첫 장편 ‘갈매기’(2020)로 주목받은 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경주기행’은 여성 제작자, 여성 감독, 여성 주연배우들이 함께 만든 드문 한국 상업영화다. 김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내게 살풀이에 가깝다”고 했다. 가족에 대한 오랜 질문을 이번 작품에 쏟아낸 그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영화를 정말 만들고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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