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998년 무더운 여름, 강원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취재한 사진이다. 이날 무지 더웠다. 하루 종일 트라이포드에 망원랜즈를 거치하고 땡볕에서 고라니를 기다렸다. 한 마리는 쉽게 찍었지만 왠지 부족했다. 두 마리 이상이 같이 앵글에 들어오기를 고대하면서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5-6시간을 기다린 끝에 두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취재했다. 읍내 사진관으로 나와 필름을 현상하고 스켄을 받아 본사로 전송했다. 데스크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받은 사진으로 기억한다.
인적이 끊긴 DMZ 안쪽을 따라가다 물웅덩이에서 찾아 헤매던 고라니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한 마리는 물속에 몸을 담근 채 헤엄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물가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신속하게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 모터 드라이브 소리를 들은 사진 속 고라니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바라본다. 물에 들어간 녀석은 긴 목만 수면 위로 내놓은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물 위로 비친 붉은 몸과 짙은 숲의 그림자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DMZ는 사람에게는 군사분계선이라는 이름의 긴장된 경계였지만 야생동물에게는 달랐다. 사람의 발길이 제한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숲과 습지는 동물들의 공간이 됐다. 당시 취재 현장에서도 고라니는 비교적 자주 눈에 띄던 동물이었다.
고라니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서식지가 제한적인 동물이다. 중국과 한반도 등에 주로 분포한다. 수컷에게 뿔이 없는 대신 입 밖으로 길게 드러나는 송곳니가 특징이다. 물을 꺼리지 않고 헤엄도 잘 친다. 영어 이름 ‘워터 디어(Water deer)’에도 물과 가까운 생태적 특성이 담겨 있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고라니의 처지도 달라졌다. 국내에서는 개체 수가 늘면서 농작물 피해나 도로 위 로드킬로 자주 언급된다. 귀여운 모습은 그대로인데 농민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고 운전자에게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드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된 필름 속 고라니는 그런 숫자와 통계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 철책과 지뢰밭 너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서 물을 가르며 헤엄치던 한 마리와 물가에서 망을 보던 또 한 마리. 긴장의 땅에서 오히려 가장 평온해 보였던 것은 야생동물이었다.
외장하드를 열 때마다 사진은 그날의 기억을 불러낸다. 물소리와 풀 냄새,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르던 순간까지.
사람이 임의적으로 그어놓은 분단선을 알 리 없는 고라니는 그날도 물을 건너 남북을 오고 갔다. 그들에게 DMZ는 경계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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