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에게 영감을 주는구나.”
교통사고로 4년간 바이올린을 놓아야 했던 제자가 다시 활을 잡기로 결심했을 때 거장인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 1월 미국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 무대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현재씨 이야기다. 스승은 고토 미도리. 11세에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데뷔한 뒤 반세기 가까이 정상급 연주자로 활동해 온 거장이다.
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임씨는 커티스음악원을 졸업했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2020년 국내에 일시 귀국했다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후 6차례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시 활을 잡기로 결심하기까지는 4년여 세월이 흘렀다. 사실 연주가 아닌 다른 삶을 준비하기도 했다. 임씨는 “한동안은 제가 다시 바이올린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무엇을 좋아할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고 돌아봤다. 고민 끝에 무인문구점을 한때 운영하기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접근성이 괜찮겠다고 판단해 문을 열었고, 막상 운영해 보니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 한동안은 즐겁게 꾸렸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음악을 놓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다시 악기를 든 순간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임씨는 “처음 다시 활을 잡았을 때는 생각보다 너무 잘 되는데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며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 연주에 대한 객관성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계속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마음이 흔들릴 겨를은 오히려 없었다. 그는 “이미 결심한 만큼 스스로를 계속 밀어붙이면서, 조금씩이라도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결심을 굳힌 뒤 그는 커티스에서 자신을 지도한 은사 미도리에게 이를 알렸다. 미도리는 영감을 준다는 말로 제자를 격려했다. 임씨는 “제가 스스로를 믿기 어려운 순간에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지난해 20여년 만에 열린 방한 독주회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제자의 연주를 직접 살폈다. 임씨는 “연주 직전까지 함께 음악을 봐주실 정도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며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저에게는 굉장히 큰 힘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동기”라고 말했다.
복귀 이후 임씨는 휠체어에 앉아 연주를 이어가며 윤이상국제콩쿠르와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잇따라 준결승에 올랐다. 지난해 제20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올해 1월 미국 엘마 올리베이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는 우승과 함께 위촉곡 최우수 연주상·이자이 소나타 최우수 연주상까지 받아 3관왕에 올랐다. 영국 클래식FM이 선정한 ‘30세 이하 라이징 스타 2026’에도 이름을 올렸다.
임씨는 21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의 지휘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임씨는 츠베덴과의 리허설에 대해 “특별히 어떤 것을 요구하셨다기보다는, 제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지 말로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파악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지휘자가 음악적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 덕분에 훨씬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협주곡 해석에 대해서는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아주 강한 열정과 순수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며 “그 두 가지가 함께 만들어내는 따뜻함이 이 곡의 큰 매력이고, 그런 감정이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연주 뒤에도 그의 일정은 이어진다. 엘마 올리베이라 콩쿠르 우승으로 앞으로 3년간 미국 뉴욕·보스턴과 이탈리아 크레모나 등 주요 공연장에서 30회 이상 연주할 기회를 확보했다. 오는 11월에는 만토바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한국 투어도 예정돼 있다. 4년의 공백을 지나 그는 다시 무대 위의 일정으로 채워진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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