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윤치영부터 ‘봉오동 영웅’ 최진동까지…서훈 박탈, 변절 의혹 제기
“과오와 공적 모두 직시해야”…철저한 공적 재검증으로 바른 역사 세워야
역사의 물줄기는 때로 잔혹한 반전을 품는다. 일제의 압제에 맞서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고 피 흘려 싸웠던 애국지사들이 세월이 흘러 식민 지배의 부역자로 전락하는 비극은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흔이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촉발된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경기 안양시로까지 번진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2~1927)에 대한 친일 논란은, 우리가 기억하고 추앙해 온 역사 속 인물들의 공과(功過)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다시금 던지고 있다.
◆‘안양의 독립운동가’라던 안상호의 반전…안양시, 블로그 글 비공개
최근 경기 안양시는 공식 블로그에 올렸던 ‘안양의 독립운동가 안상호’ 게시물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2020년 광복 75주년을 맞아 시민기자단이 작성했던 해당 글은 일제강점기 의사로 활동한 안상호를 안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증손녀인 배우 하영(안하영)이 방송에서 집안 내력을 언급한 이후, 안상호가 1916년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한 기록이 재조명되면서 사태는 반전됐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조차 ‘총독정치를 시인하고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규정한 대정친목회 활동 이력이 확인되자, 지자체가 검증 없이 친일 의혹 인물을 독립운동가로 포장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이 확산하자 배우 하영은 무지와 경솔함을 사과하는 자필 사과문을 올렸고, 안양시 역시 글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앞서 안양시 공식 블로그에 게시된 글에는 “취재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안상호 선생님. 안양의 독립운동가가 이리도 많다니. 독립운동이라 하는 것은 앞장서서 일본 지도자를 대항하여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닌 자신의 영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다는 것도 느끼게 해준 인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상호의 사례는 가족의 실수나 지자체의 해프닝에 그치지 않는다. 초기에는 민족운동에 헌신하거나 지역사회의 귀감이 됐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억압과 공작을 이기지 못하고 친일로 전향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부터 윤치영까지…서훈 박탈의 역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다 친일 행적이 드러나 정부 서훈이 취소된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에 항일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기고했던 위암 장지연(1864~1921)이다.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나,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식민 지배를 긍정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글을 지속해서 기고한 사실이 확인돼 2011년 국무회의를 거쳐 서훈이 취소됐다.
언론사를 창간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민족 교육에 앞장섰던 인촌 김성수(1891~1955) 역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이후 행적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일었다. 유족과의 긴 행정소송 끝에 2018년 대법원에서 친일 행위가 인정되며 서훈이 박탈됐다.
2024년에는 서훈 박탈이 부당하다며 그의 후손이 정부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이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당시 대법원은 “김성수의 친일 행적은 서훈 수여 당시 드러나지 않은 사실로서 새로 밝혀졌다”며 “만일 이 사실이 서훈 심사 당시 밝혀졌더라면 당초 조사된 공적 사실과 새로 밝혀진 사실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였을 때 김성수의 행적을 그 서훈에 관한 공적으로 인정할 수 없음이 객관적으로 뚜렷하다”고 밝혔다.
이 밖에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1898~1996),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서춘(1894~1944), 개신교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박연서(1896~1951) 등은 일제 말기 변절해 전향 성명을 발표하거나 친일 활동을 주도한 사실이 밝혀져 유공자 명단에서 제명됐다.
2010년과 2011년, 정부는 전수 조사를 거쳐 불교·개신교계 지도자 등 친일 행적이 확정된 19명의 서훈을 일괄 취소한 바 있다.
◆‘봉오동 영웅’ 최진동의 그늘…멈춰선 가짜 유공자 검증
무장 투쟁의 전설조차 변절 의혹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 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했던 최진동(1883~1945) 장군이 대표적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그였지만, 1930년대 후반 친일파로 전향해 일본에 협조하고 헌금을 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부는 2018년부터 ‘가짜 독립유공자 검증 작업’에 착수해 최진동 등을 포함한 서훈 취소를 검토했다. 하지만 진위를 가리는 발표가 미뤄지고 있다. 정치적 파장과 후손·유공자 단체의 반발, 방대한 자료 분석 등이 이유로 추정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1992년에 펴낸 ‘친일파2’에 실린 논문 ‘권력에 농락당한 국가서훈·포상제도’에서 친일파 문제를 적시했다. “과거 정권이 친일파는 척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중용함으로써 서훈 질서와 민족정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친일 경력자를 찾아내기 위한 조사는 1980년대 초 광복회 등이 나서 진행했고, 이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어받았다.
초기의 순수한 항일 정신이 일제 전시체제의 막바지 광풍 속에서 친일 협력으로 오염된 역사적 비극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성역 없는 냉철한 검증이 왜 필요한지를 묵직하게 일깨운다. 역사의 공과는 명백히 가려져야 하며, 단 한 명의 가짜 영웅도 남기지 않는 철저한 검증이야말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지조를 지킨 진짜 순국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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