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필자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등 KBS, 2등 MBC, 3등 AAA.. 전자오락실 기계의 기록을 깨면 영어 이니셜로 이름을 써 넣을 수 있다. 영어 알파벳을 몰랐던 아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충남 서산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기자도 동네 전자오락실을 자주 찾았다. 오락실에 들어서면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귀를 찢듯 울리는 전자음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그 시절 대한민국 골목골목을 뜨겁게 달궜던 '전자오락실'은 그 시절 아이들에게 단순한 놀이 공간을 넘어, 가슴 뛰는 모험과 해방의 성지였다.
너구리, 인베이더, 갤러그, 올림픽, 제비우스 등 인기가 좋은 오락기 앞에는 동전을 쌓아 놓고 차례를 기다렸다. 내 바로 앞 아이가 오락을 잘하는 선수를 만나면 기다림은 더 길어져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다. 늦게 가서 엄마한테 혼날 생각에 게임기를 노려보며 비행기 빨리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전자오락실도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1998년에 등장한 발로 뛰고 춤추며 오락하는 ‘DDR(DanceDanceRevolution)’은 충격이였다.
전자오락실 게임은 대개 손으로 했다. 동전을 넣고 조이스틱을 잡거나 버튼을 두드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게임기 앞에서 춤추고 뛰기 시작했다. 화면에 화살표가 올라오면 왼발, 오른발을 움직였다. 앞, 뒤, 왼쪽, 오른쪽. 박자가 빨라지면 발도 덩달아 빨라졌다. 몇 곡을 끝내고 나면 이마에 땀이 맺혔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어느새 게임보다 사람의 발을 구경했다.
바로 ‘DDR’, 댄스 댄스 레볼루션(DanceDanceRevolution)이었다.
일본 코나미가 1998년 내놓은 DDR은 화면의 지시에 맞춰 발밑 패널을 밟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한국 오락실에도 빠르게 퍼졌다. 한 사람이 발판 위에 올라서면 자연스럽게 구경꾼이 모였다. 현란한 발 놀림을 뽐내는 ‘고수’가 등장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취재하는 사진기자에게도 처음 보는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어두운 오락실, 번쩍이는 화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두 발과 그 뒤로 모여든 사람들. 셔터를 누르면 그 시절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프레임에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의 1990년대 후반은 무거움과 들뜸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PC방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등장했고, 거리에 상점과 리어커에서는 흥겨운 댄스 음악이 넘쳐났다.
그 한쪽에 전자오락실도 있었다.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시절이었다. IMF 사태로 실직한 가장들이 출근 양복을 챙겨 입고 구석에서 연신 담배를 피웠다. 몇 백원을 넣고 발판에 올라서면 잠시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추억의 동네 전자오락실은 하나둘 사라졌고 게임은 이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사진 속 청춘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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