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의 법학/이재승/앨피/3만8000원
식민지배는 해방과 함께 정말 끝났을까. 신간 ‘열망의 법학’은 식민 통치가 남긴 제도와 기억, 책임 회피가 오늘날의 법과 사회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과거의 부정의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과정을 짚는 한편, 그 사슬을 끊기 위해 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책은 ‘식민지배는 해방과 함께 완전히 끝났다’는 통념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정치적으로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당시 만들어진 제도와 사고방식, 피해를 둘러싼 책임 회피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 흔적은 법 자체에도 남아 있다. 근대 국제법의 기초를 놓은 후고 그로티우스(휘호 흐로티위스)의 사상이 그렇다. 자연법과 국제법의 보편성을 강조한 그의 이론이 후대 국제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네덜란드의 해상 진출과 식민 팽창이라는 시대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과 조약이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때로는 지배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약제국주의’, ‘문명화 사명’,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살피는 대목도 이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식민지배는 군사력과 직접적인 폭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조약과 법률, 행정 제도 등 근대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정당화됐다. 저자는 식민지배가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과 수탈의 현실을 가리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여러 법질서의 공존을 인정하는 법다원주의 역시 현실의 힘의 차이를 외면할 경우 불평등한 식민 통치를 미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법은 어디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저자가 제시하는 핵심은 ‘아래로부터의 국제법’과 ‘자결권’이다. 저자는 자결권을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할 권리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식민지배를 겪은 사람들이 자신의 공동체와 기억,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해 해석한다. 식민지 조선인의 국적, 한국인의 주권, 헌법 전문 등을 살피는 것도 자결권이 국가가 위에서 부여하는 권리가 아니라 지배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요구하고 구성해온 권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자는 간토대학살과 야스쿠니신사 강제합사, 재일교포의 고국권, 식민지 출신 군인과 유해 문제 등을 각각의 피해 사건이나 한·일 간 외교 현안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결권, 진실에 대한 권리, 애도권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국가는 누구의 죽음을 기억하고, 누구의 죽음을 주변부로 밀어내는지를 묻는다.
저자는 “식민지배를 당한 민족들에게는 하나의 압도적인 열망이 자리한다”며 이를 “현재 인류의 삶에 작동하는 식민적 관계 방식을 뿌리 뽑고 보편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또 “현실에서는 결함투성이 국제법마저 패권국에 휘둘리며 액상화돼 간다”며 “이제 제 민족이 결집해 공동 번영의 새로운 경로를 개척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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