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한인 시인들과 뜻깊은 대화
詩·고국·로키산맥 빙하·기후위기…
나직이 ‘듣는’ 여행서 희망 되찾아
‘누가 나 좀 구해줘!’ 나는 16개월째 속으로 울며 구조 요청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태연한 생활인의 가면을 썼지만, 혼자가 되면 컴컴해졌다. 내면의 램프가 망가졌나? 모두 각자의 트라우마와 상실감을 극복하며 사는데, 나보다 더한 일을 겪고도 타인을 배려하며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매일 자책했다. 작품을 마감할 때마다 원고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직도 불구덩이, 잿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암울하고 진부하게 써대는 내가 끔찍했다. 산불로 전소한 집터에서 미치광이가 된 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 악몽을 꾸다가 깨면 온몸이 젖어 지저분한 여름이었다.
“거봐, 집에 불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잖아.” 친구가 말했다. 재미시인협회에서 7월 여름문학축제 강연자로 나를 초청하며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셨기에. 나는 출국일을 구원처럼 손꼽아 기다렸다. 일상에서 벗어나 나쁜 기억을 모조리 떨쳐버리고 싶었다. 괜찮은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대규모의 재미시인협회 여름문학축제와 문학기행을 마친 7월 하순, 나는 여덟 분의 시인과 함께 캐나다로 갔다. 밴쿠버에 도착한 날, 우리는 현지 작가들과 만났다. 작가명은 김석봉, 임현숙, 김경래, 김수수, 김계옥, 김회자, 윤미숙, 로터스 정, 민정희, 심현숙. 그분들이 밴쿠버에서 살아가며 한국어로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언급하고 싶다. 어쩌면 문학은 타자의 말을 대신해 주는 언어가 아닐까? 우연한 마주침으로 변모하는 존재를 성찰하고 증명하는 장르가 아닐까. 우리는 한인타운 내 식당에서 근처 디저트 카페로 옮겨 밤늦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언제 이민 오셨어요?” 나는 말수 적어 보이는 김수수 시인에게 말을 걸었다.
“2010년도에 영주권을 받았고 2012년 밴쿠버에 정착했어요. 남편이 밴쿠버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을 하고 있었어요.”
“시인님은 등단작에서 윤동주 시인을 ‘당신’이라고 부르셨죠. 그 시에 얽힌 사연이 있으세요?”
“고국이 그리울 때 저는 바다를 찾아요. 바다에 가면 고국과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캐나다 서리에 위치한 크레센트 비치에 며칠 동안 갔던 날도 그런 아득한 가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구 한 구절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타국의 심해를 박차고/이제는 떠오르고 싶은 밤 크레센트 비치에서//꼭지를 돌리면, 달의 정수리/당신이 사는 나라의 바람을 지나왔을까//조각달 속에서/한 꺼풀씩 떨어지는 젖은 눈썹//나는 오래 당신을 앓았다//물결의 껍질이 끊어질 듯 이어질 때/이제 소원을 밝혀도 될까//당신의 괴로움을 솎아내지 못한 밤//...//조각조각 꾸었던 꿈/가을을 줍다가 보았다//둥근 시 굴리고 있는 윤동주, 당신을
-김수수 ‘가을을 줍다가 당신을 만났다’ 부분
“김이듬 시인님! 내일 로키산맥으로 떠나시죠?”
“네, 여행사를 통해 단체관광을 갈 예정이에요. 꼭 봐야 할 곳을 추천해 주실래요?”
“로키산맥은 워낙 방대하고 광활하여 한두 번 가보고는 ‘로키를 가보았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로키의 정점은 컬럼비아 빙원의 일부인 아사바스카 빙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설상차를 타고 들어가 빙하를 보았을 때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까요. 생명의 근원에 다가간 느낌. 내가 사라지고 빙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을 기억합니다. 10년 전쯤 벅찬 마음으로 다시 아사바스카 빙하에 찾아갔다가 저는 크레바스보다 더 깊은 감정의 골에 빠졌어요. 그 듬직하던 빙하는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빙하만 남아 있었거든요. 마음 한편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이후로도 여름이면 캠핑 장비를 챙겨 로키의 구석구석을 찾곤 합니다.” 우리는 자연 훼손 문제, 기후 위기로 사라지는 빙하를 걱정했다.
조금이나마 내가 달라지긴 했나? 화자에서 청자로, 겸허하게 듣고 전하고 싶어졌다. 로키산맥 대자연이 내게 치유와 위로를 주었을까? 긴 여정을 함께한 맑고 긍정적인 시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까? 재외동포 작가님들과 나직하게 나눈 대화에서 희망 품는 법을 배웠을까? 과분한 여름휴가였다. 나는 밝게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김이듬 시인·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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