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출판사 SNS서 수상 확인해
믿을 수 없어… 잘못 올렸다 생각
韓 출판만화 망했다는 시선에도
쌩쌩히 만화를 한다고 자부해
한국 만화시장에는 두 개의 ‘판’이 있다. 출판만화와 웹툰이다. 웹툰산업은 2024년 2조2000억원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출판만화는 대중과의 접점이 넓지 않다. ‘2024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만화·웹툰 이용자 중 웹툰을 ‘거의 매일’ 본다는 응답이 24.6%로 가장 많았다. 반면 출판만화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는 응답(31.4%)이 가장 많았다. 그나마 읽히는 출판만화도 상당수는 일본 만화 번역본이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산호(필명) 작가가 지난달 미국 만화계 최고 권위의 아이스너상 ‘우수 아시아 만화 미국판’ 부문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그의 첫 만화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이하 ‘연옥당’) 1권. 경남 김해에 사는 작가를 지난 6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연옥당’ 미국 출판사 다크호스 코믹스의 SNS 게시물을 통해 수상 소식을 알았다”며 “처음에는 잘못 올라온 줄 알았다. 사실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이게 나한테 벌어진 일이 맞나’ 싶었다”고 했다.
‘연옥당’은 사람이 죽은 뒤 49일 동안 연옥 벌판을 지나 환생문에 닿기까지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고인과 깊은 추억을 지닌 이가 망자를 위한 케이크를 주문하면, 연옥을 관장하는 까마귀신 ‘마고’는 그 기억을 담아 케이크를 만든다. 2019년 독립출판으로 처음 선보인 작품은 이후 문학동네에서 출간됐고, 지난해 3권으로 완결됐다. 미국·일본·대만·스페인 등에 판권이 수출됐다.
산호 작가는 “거의 활자 중독으로 자랐다”고 말했다. 만화와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특히 판타지와 SF에 빠져 10대를 보냈다. 세뱃돈을 털어 산 전민희 작가의 판타지 소설 ‘룬의 아이들’은 “닳도록 본 책”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취향은 “일상적 장면에 비일상적 요소가 침투하는 것”이다. 그는 어슐러 K. 르 귄이 판타지를 두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았을 뿐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한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현실을 그대로 직언하면 외면하고 싶어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판타지 형식으로 내밀면 독자들이 굉장히 깊게 몰입해요.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데 판타지만큼 탁월한 장르가 없는 것 같아요.”
정작 만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괴로울 것 같다. 두 번째로 좋아했던 영화를 업으로 삼고 만화는 취미로 하겠다는 생각에 대학에서 영화·영상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림 실력이 발군이었다. 선·후배들의 영화 스토리보드를 도맡아 그렸다. 그는 스토리보드를 “대사가 없는 만화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컷을 나누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감각을 그 과정에서 익혔다.
웹툰이 대세인 시대에 출판만화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는 형식이라고 생각해서다. 스크롤을 따라 세로로 읽는 웹툰이 시간과 공간을 조절하는 데 뛰어난 형식이라면, 그에게는 가로로 넓은 영역이 필요했다. “펼친 책의 양쪽 페이지가 저한테는 창문과 같습니다. 가로로 긴 구도가 늘 편안했어요. 영화 프레임으로 컷과 이미지를 배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책의 물성 자체도 좋아한다. 그는 “웹툰이 종이책으로 나오는 것도 굉장히 좋아한다”며 “종이책으로 이야기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기가 세상에서 죄다 끊겨도 손에 쥘 수 있는 책은 남잖아요. 종이책에서는 ‘전기 없는 시대가 오더라도 당신에게 읽히겠다’는 각오가 느껴져요. (웃음)”
그의 첫 작품인 ‘연옥당’과 두 번째 작품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고블, 2023·2025, 전 2권)는 초등학교 고학년에게도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산호 작가가 만화를 시작하며 세운 목표 중 하나도 “두 작품 정도는 초등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을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도서관의 만화를 독파하며 얻은 배움과 즐거움을 다음 세대 독자와 나누고 싶어서였다.
최근작으로 갈수록 그의 세계는 한층 선명하고 뾰족해지고 있다. ‘유리병 속의 나나니’(그래픽, 2025, 이하 ‘나나니’)를 거쳐, 최근 포스타입을 통해 공개한 ‘지구 최후의 메이드’에서는 그 색채가 더욱 뚜렷하다. 작가 역시 ‘나나니’ 작업을 기점으로 자신의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만화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면서다.
무엇보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솔직함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말로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솔직함’은 편안한 말이 아니다. 모서리가 있기에 상처 입히거나 상처받을 각오가 필요하다. 그는 “솔직함이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며 “정말 뛰어난 만화를 보면 작가가 자신의 오장육부를 다 보여준다. 용기가 없으면 절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최종적인 목표도 분명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제대로 아는 작가가 되는 것.”
그는 웹툰 플랫폼의 연재 제안을 몇 차례 고사한 바 있다. 출판만화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워 일러스트 외주 작업을 병행한다. 이산화·김창규·정명섭 등의 책 표지를 비롯해 수많은 출판물과 영화 포스터 등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전체 작업시간의 60~70%를 외주에 쓴다. 만화에 집중할 때면 외주 일을 줄이고 하루 14~15시간씩 만화에 몰두한다.
“사실 한국에서 출판만화를 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껴요. 출판만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 출판만화는 다 망했지’라고 말하는 외부의 시선이 더 큰 벽처럼 느껴져요. 저는 살아서 만화를 하고 있는데 자꾸 밖에서 출판만화를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런 시선 때문에 (출판만화) 영역이 확장되기 어렵다고도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아이스너상도 개인의 영예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내가 받았다는 것보다 한국 출판만화에 상이 수여됐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수상이 독자들이 종이 만화를 다시 찾는 데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읽은 수많은 만화와 소설은 그를 가보지 못한 세계로 데려갔다. 그 짧은 여행들이 쌓여 지금 만화를 그리는 힘이 됐다. “제 만화도 독자들을 낯선 세상으로 초대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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