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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아들의 '하부장 털이'와 미룬이 기자의 첫 문장 [기자수첩]

입력 :
양다훈 기자 yangb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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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를 이용해 생성한 AI이미지.
제미나이를 이용해 생성한 AI이미지.

 

우리 집 3살짜리 첫째 아들과 연년생 동생은 매일 주방에서 대재앙을 기획한다.

 

주요 타깃은 싱크대 하부장. 틈만 나면 기어 들어가 간장, 식초, 꿀, 올리고당을 종류별로 꺼내 바닥에 나열한다. 뚜껑이라도 열리는 순간 그곳은 끈적거리는 현장이 된다. 대재앙이 발생하면 나나 아내나 경악하며 달려가 수습하기 정신없다.

 

형이 꿀병을 잡으면 동생은 옆에서 ‘어? 재밌겠네?’ 하고 식초병을 집어 들어 뚜껑을 돌린다.

 

재앙을 저지른 후 아이들 얼굴을 보면 위축되거나 눈치를 보는 기색은 전혀 없다. “다음엔 뭘 터뜨려볼까”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음 타깃을 물색할 뿐이다.

 

 

얘네는 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하부장을 여는 것은 남에게 평가받는 일도, 잘해야 하는 과제도 아니다. 그저 궁금하니까 일단 해보는 영역이다.

 

‘망치면 어쩌나, 혼나면 어쩌나’ 하는 계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시작은 언제나 100%의 즐거움이자 탐색이다.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개그맨 이제규의 노래 ‘미룬이’ 가사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시작을 내일로 미루고, 막상 ‘끝내는데만 급급한 어른’도 되지 못했다는 자조 섞인 가사가 내 이야기 같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기사를 쓰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던 참이었다.

 

‘이 문장이 어색하면 어쩌지?’, ‘독자 댓글에 털리면 어쩌지?’ 온갖 검열과 평가의 시선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첫 타자조차 치지 못하는 ‘미룬이 기자’가 되어 있었다.

 

“춤추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크트웨인의 명언이다. 세상이 온통 날 쳐다보고 평가하려 눈을 번뜩이는데 어떻게 아무도 안 보는 것처럼 춤을 추겠는가. 하지만 내 앞의 3살짜리들은 진짜 아무도 안 보는 것처럼 막춤을 추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결과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손을 뻗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과감한 ‘첫줄 작성’이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거창한 취재원이나 완벽한 개요표가 아니라, 저 두려움 없는 3살짜리들의 뻔뻔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사도 어차피 첫 문장부터 시작이다.

 

주제나 문장이 좀 삐끗하면 어떤가. 쏟아진 간장을 치우듯 잘못 쓴 글을 고치고 다듬는 퇴고는 나중에 ‘어른의 나’, 혹은 ‘데스크’와 함께 하면 될 일이다.

 

적어도 글을 시작하는 첫 순간만큼은, 꿀병을 집어 드는 3살짜리처럼 쫄지 말고 일단 질러야 한다. 완벽주의라는 환상에 갇혀 덜덜 떠는 어른 대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아이의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녀석들은 하부장 문을 쾅 열어제낀다.

 

에라 모르겠다. 쏟아지면 치우면 되지. 일단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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