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3000만원 규제 후 거래대금 12.4조→9198억…레버리지 급감
코스피 3.76%·삼전 2.50%·하닉 5.77%↑…보험료는 폭락 예고 아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주가가 하루 만에 반토막 나면 손실을 대신 물어달라.”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헤지펀드와 기관투자자를 상대로 이런 조건의 이른바 ‘폭락 보험’을 사들이고 있다. 별일이 없으면 보험을 판 투자자가 프리미엄을 챙기지만, 계약에서 정한 급락이 발생하면 거액의 손실을 떠안는 구조다.
골드만삭스가 제시한 거래의 예상 연환산 수익률은 최고 20%에 달했다. 예금처럼 보장되는 금리는 아니다. 보험을 파는 투자자가 레버리지까지 활용한다는 조건에서 계산된 수익률이다. 폭락 조건이 현실화하면 그동안 받은 프리미엄을 뛰어넘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실제로 하루 50% 폭락한다는 전망도 아니다. 국내 증시의 하루 가격제한폭은 ±30%다. 정상적인 정규장 거래에서 두 종목이 하루 만에 반토막 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월가에서 이런 계약의 몸값이 뛰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기초자산으로 한 2배 레버리지 상품이 급증하면서 금융회사들이 발생 가능성은 작지만 한번 터지면 손실이 큰 ‘꼬리 위험’까지 돈을 주고 떼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는 정반대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금융당국의 규제로 단일종목 레버리지 거래는 빠르게 식었고, 5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동반 반등했다. 폭락 보험의 가격과 실제 주가의 방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50% 하락하면 2배 상품 ‘0원’…은행에 남는 초과손실
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크래시 풋’과 ‘크래시 클리켓’으로 불리는 장외 파생상품 거래가 늘고 있다.
이들 상품은 기초주가가 계약에서 정한 수준 이상 급락하면 손실을 보상하도록 설계된다. 쉽게 말해 레버리지 상품에 수익률을 제공하는 은행이 사들이는 폭락 보험이다.
미국과 홍콩 등에 상장된 레버리지 상품 운용사는 은행과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맺어 기초주식의 일간 수익률을 2배 또는 3배로 추종한다. 운용사는 금융비용과 수수료를 지급하고 은행은 약속한 배율의 수익률을 제공한다.
문제는 주가가 순식간에 무너질 때다. 2배 레버리지 상품은 기초주가가 하루 50% 하락하면 목표수익률이 이론상 마이너스 100%가 된다. 상품의 순자산이 모두 소진되는 수준이다.
이를 넘어서는 손실이 발생하면 운용사가 가진 자산만으로 은행에 지급할 금액을 충당하지 못할 수 있다. 이른바 ‘갭 리스크’다.
은행은 이런 극단적인 위험의 일부를 외부 투자자에게 넘긴다. 은행이 보험료를 지급하고 헤지펀드 등이 보험을 판다. 폭락이 발생하지 않으면 보험을 판 쪽이 수익을 얻지만, 약속한 조건을 넘는 급락이 나오면 은행의 손실을 대신 부담한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5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급락 위험을 떠안을 투자자를 모집하며 연환산 14.2~20%의 예상 수익률을 제시했다. 만기는 최대 1년으로, 투자자가 레버리지를 활용하는 구조였다.
BNP파리바가 제시한 최대 6개월짜리 ‘일일 갭 풋’의 프리미엄도 SK하이닉스 6.5%, 삼성전자 5.5%까지 올랐다. 지난 3월 각각 3.5%, 2%였던 것과 비교하면 두 달 사이 크게 뛰었다. 해당 수치는 블룸버그가 입수한 BNP파리바의 마케팅 자료를 통해 확인됐다.
국내 정규장의 가격제한폭을 적용하면 2배 상품의 하루 이론상 최대 손실은 60%다. ‘하루 50% 폭락’은 국내 주가에 대한 전망이라기보다 2배 상품의 자산이 모두 사라지는 지점을 기준으로 은행이 설정한 위험관리선에 가깝다.
◆현금 3000만원 규제 뒤 거래대금 1조원 밑으로
월가에서 폭락 위험을 사고파는 사이 국내에서는 과열됐던 단일종목 레버리지 거래가 빠르게 식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일간 수익률을 2배로 추종하거나 반대로 움직이는 국내 단일종목 ETF와 ETN은 지난 5월27일 처음 상장됐다. 현재 ETF 16개와 ETN 2개가 거래되고 있다.
개인 자금이 몰리면서 상품 운용사의 리밸런싱 거래가 본주와 코스피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31일부터 개인 일반투자자의 기본예탁금을 1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올렸다. 주식과 ETF, 채권 등 대용증권을 인정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3000만원을 채워야 새로 사거나 추가 매수할 수 있게 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16종의 거래대금이 전체 ETF 거래대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월30일 33.4%에서 규제 시행 첫날인 31일 6.6%로 급락했다. 8월3일에는 5.4%, 4일에는 4.5%까지 낮아졌다.
5일 비중은 5.7%로 소폭 반등했지만 실제 거래대금은 9198억원으로 줄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거래대금이 1조원 아래로 내려간 것은 5월27일 상장 이후 처음이다. 규제 시행 직전인 7월30일 12조4485억원과 비교하면 일주일 만에 92.6% 감소했다.
해외에서 조성된 레버리지도 크게 줄었다. JP모건 리서치에 따르면 한국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한 레버리지 ETF 자산은 한때 약 500억달러까지 불어났다가 최근 170억달러 수준으로 감소했다.
정부는 추가 규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긴급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개인별 단일종목 레버리지 투자 한도를 전체 투자금액의 20% 이내로 제한하는 총량관리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과다 주문에 비용을 물리는 제도와 모의거래 도입 등도 함께 검토 대상에 올랐다.
◆사상 최대 실적 발표하자 -9.6%…이틀 뒤 상한가
최근 시장에서는 기업 실적과 주가가 따로 움직였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2분기 영업이익이 60조5426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557% 늘었다고 발표했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였지만 약 64조원이던 시장 전망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실적 발표 당일 SK하이닉스 주가는 9.61% 하락했다. 장중 낙폭은 19%를 넘었다. 삼성전자도 5.23% 내렸다. 사상 최대 실적보다 높아진 시장의 기대치와 레버리지 포지션 축소가 주가를 더 크게 흔들었다.
불과 이틀 뒤 상황은 뒤집혔다. 7월31일 SK하이닉스는 29.95% 오른 171만8000원으로 상한가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도 26.81% 급등했다. 코스피는 하루에만 1001.89포인트, 17.91% 뛰어 6595.45에 마감했다. 상승폭과 상승률 모두 사상 최대였다.
이후에도 롤러코스터는 멈추지 않았다. 5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9.31포인트(3.76%) 오른 6598.26에 마감했다. SK하이닉스는 5.77%, 삼성전자는 2.50% 상승했다.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4463억원을 순매수했다.
미국 반도체주 강세와 미국·이란 간 협상 기대가 겹치면서 위험자산 선호가 살아났다. 며칠 사이 두 자릿수 급락과 급등, 재반등이 반복됐다.
기업가치가 며칠 만에 그만큼 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적 기대치와 레버리지 축소, 외국인 수급, 미국 반도체주 움직임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주가가 펀더멘털보다 자금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연 20% 폭락 보험’과 ‘코스피 1만2000’은 모순일까
월가에서 폭락 보험 가격이 뛰었다고 해서 글로벌 IB가 한국 주식을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한국 증시의 AI주 매도세가 과도하다는 기존 강세론을 재확인했다.
12개월 코스피 목표치도 1만2000을 유지했다. 메모리 공급 부족과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다.
한쪽에서는 한국 주식의 추가 상승을 예상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돈을 주고 폭락 위험을 헤지한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금융시장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가가 장기적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해도 하루나 며칠 사이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인 손실은 별도의 문제다. 특히 2배·3배 레버리지 상품을 공급하는 금융회사라면 발생 확률이 낮은 사고라도 한번 터졌을 때 자본을 훼손할 정도라면 보험을 사는 것이 합리적이다.
골드만삭스의 주식시장 전망을 담당하는 리서치 부문과 레버리지 상품의 위험을 관리하는 트레이딩 부문의 목적도 다르다. 코스피 목표치와 폭락 보험료를 같은 방향성 전망으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크래시 풋 거래 증가를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곧 반토막 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국내에서는 현금 3000만원이라는 진입장벽이 레버리지 거래를 빠르게 줄였다. 외국인은 다시 한국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주가도 반등했다.
그런데도 월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극단적인 가격 변동에 매기는 보험 가격은 이전보다 비싸졌다. ‘폭락이 온다’는 예언이 아니다. 폭락할 확률은 낮아도 한번 터졌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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