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으로 채워진 들판,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줄지어 선 어린 나무숲의 풍경은 이내 정돈되지 않은 마당, 길가를 향해 놓인 의자, 문가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는 장년의 사람들을 비추며 어느 농촌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농번기를 맞이한 바쁜 농부들이 가끔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에는 자연의 섭리나 삶의 순리처럼 무거운 어휘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든다. 이 마을의 젊은 청년 민우(김민혁)는 행정복지센터에 근무한다. 민우의 아버지(문영동)는 가뭄이 들거나 비가 내리면 논에 댈 물꼬 생각에 언제나 논으로 향하는 농부다. 민우의 친구 성훈은 아버지의 축사 일을 돕는다. 두 청년은 오랜만에 만나 술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가족의 안부를 묻다가 이내 과묵해진다. 최승우 감독의 ‘지난 여름’은 농촌의 사소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의 다큐멘터리와 민우 가족의 이야기인 픽션으로 함께 다룬다. 가뭄, 장마, 추수로 구성된 세 장(章)을 지나며 가뭄이 들었다 단비가 내리고 비가 멎으면 민우는 어디론가 향한다.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것이 전부다. 더 정확히는 영화는 사건을 극화시켜 서사로 전개해 나가지 않는다. 첫 장편영화로 ‘지난 여름’을 연출한 최 감독은 뒤늦게 영화에 관심이 생겨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페드로 코스타나 차이밍량을 좋아하는 감독으로 밝힌 그의 선호와 영화에 남아 있는 그 오묘한 영향에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이 영화가 추수의 장으로 넘어갔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의외로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 ‘꽁치의 맛’이다. 두 영화 사이의 닮음과 다름이 왜인지 나란히 두고 놓아 보게 만든다. 오즈의 영화는 딸의 결혼을 걱정하는 아버지라는 소재와 주제가 여러 편의 영화에 반복된다. ‘꽁치의 맛’ 역시 결혼 적령기에 놓인 딸 미치코의 결혼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중심에 놓인다. 시종 가동되는 공장의 기계적 풍경은 산업이 가속화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한다. 영화는 딸의 결혼식 당일 전통 혼례복을 입은 미치코의 모습과 예식장으로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며 희미하게 여운을 남긴다.
‘지난 여름’의 카메라는 농촌에 머물며 그곳 마을에 다가온 하루의 다른 시간을 다르게 지켜본다. 화창한 한낮, 어스름 저녁이 내려앉은 논 가, 선명하고 아련한 노을이 그렇다. 장년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하릴없이 지켜본다. 농부들은 가뭄이 들면 비가 내리지 않는 날씨를 걱정한다. 비가 오면 물꼬를 열어 논으로 물이 잘 흘러 들어갈지 마음 쓴다. 오즈의 영화가 관혼상제 중에서 혼례에 집중했다면 ‘지난 여름’이 유의 깊게 바라보는 것은 제례와 상례다. 한 존재가 가졌던 생명의 소멸은 어두운 밤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의 심정 또한 반드시 늪에 머문 발처럼 떠나보내기 어렵고 무거운 일만도 아니다. 사람이 어쩔 도리 없는 날씨의 변화처럼 왔다가 떠나는 삶의 시간에도 여전히 마을 농부들에게는 추수라는 기쁨이 잔잔하게 맴돈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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