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국회선진화법 개정 추진
與 “野 필버 32번… 민생입법 지연”
상임위 지연 방지·패트 심의 단축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손질을 예고하면서 2012년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이 14년 만에 대폭 개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상임위원장이 정당한 이유 없이 법안 심사를 지연할 경우 위원장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제도를 악용해 민생입법을 가로막고 있다며 집권여당의 책임정치를 위해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다수당이 소수당의 견제 수단을 무력화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 한병도 대표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2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은 필리버스터와 패스트트랙이 본래 취지에 맞게 작동하도록 국회법을 합리적으로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한 원내대표는 “22대 국회 들어 국민의힘이 남발한 필리버스터만 무려 32번으로 총 750시간에 달한다. 소수의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가 국회를 마비시키고 민생입법을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장 330일이 걸리는 패스트트랙에 대해서도 “이름뿐인 패스트트랙”이라며 “패스트트랙이 아니라 슬로트랙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고 했다.
이날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는 상임위원장이 정당한 사유 없이 회의 개최나 의사진행을 거부하거나 법안 심사를 현저히 지연할 경우 위원장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상정됐다. 재적 위원 3분의 1 이상이 교체를 요구하고 과반이 찬성하면 위원장을 바꿀 수 있도록 한 내용이다.
필리버스터 도중 의사정족수가 미달하면 국회의장이 회의를 중지할 수 있도록 하고, 토론 종결이 선포된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건을 표결할 수 있게 하는 개정안도 함께 상정돼 소위원회로 회부됐다.
민주당은 패스트트랙 심의 기간도 대폭 줄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상임위원회 심사 기간은 현행 180일에서 60일로, 법제사법위원회 체계·자구 심사 기간은 90일에서 15일로 단축하는 내용이다. 운영위원장인 한 원내대표는 “국회의 시계가 멈춰서는 일이 없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은 “일 잘하는 국회는 어느 한쪽 방향으로 품질 미달의 법안들을 양적으로 밀어내는 국회가 아니다”라며 “여야 협치가 살아 있어 고품질의 성과물을 창출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개정안이 소수당의 견제 수단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장동혁 대표는 “국회 본회의장을 민주당 의원총회장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 도중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회의를 중지하지 못하도록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다만 의석수 열세로 민주당의 법안 처리를 막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과 이를 둘러싼 여야 몸싸움·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2012년 도입됐다. 직권상정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대신 소수당의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수단인 필리버스터와 일정 기간 심사 뒤 안건을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했다.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를 종결하거나 쟁점 법안을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해 다수당의 일방 처리를 막되 충분한 숙의 뒤 표결로 결론을 내도록 한 것이 제도의 핵심이다.
국회선진화법 처리를 주도했던 황우여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법안의 전체적인 취지가 소수당의 목소리를 법안에 반영하라는 것으로 마지막에는 표결로 하겠지만 그 전에는 충분히 협의를 하라는 것이었다”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충분히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 제도 도입의 취지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책임정치 차원에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충분한 공론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정치에서 다수당의 결정권은 필요하지만 소수당이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승복할 수 있는 조건은 만들어야 한다”며 “다수 의석만으로 규칙 개정을 밀어붙이면 다수당이 바뀔 때마다 운영 규칙이 바뀌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이종훈 정치평론가는 “국민의힘도 과한 측면이 있다. 무조건 정부·여당과 각을 세우려는 강성 지도부에 문제가 있다”면서도 “여당이 저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없애려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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