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폐회식 무대 ‘백자그릇’서 착안
우리의 고유 문화 상징 담아 연출
“전통의 품위 지키며 현대와 연결”
쏟아져 내리는 햇살 아래 25인의 무용수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흩어져 있던 몸짓은 서로를 감싼 채 거대한 원을 그려냈다. 지난 1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회식의 대미를 장식한 한국의 강강술래는 전쟁과 기후위기 속 인류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였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개·폐회식을 연출한 원일 총감독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지향하는 화합과 공존의 철학을 한국 전통예술의 언어로 번역했다. 개회식 이튿날 만난 원 감독은 “큰 하늘 아래에서 인류의 갈등과 유산을 지키는 데 생기는 문제들을 화합을 통해 해결해 나가자는 주제를 잡았다”고 말했다.
광화문에서 울린 엄고(嚴鼓)로 시작된 개회식 공연은 ‘한국의 문’과 ‘태평의 문’, ‘사유의 문’을 지나 ‘화합의 문’으로 이어졌다. 원 감독은 공간적 장치인 ‘문’에 세계를 마주한 한국의 모습을 담았다. 그는 “한국이라는 문이 이제 세계인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 위치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한국적 상징을 동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원 감독이 오래 이어온 작업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에는 개인의 미학을 앞세우기보다, 한국을 대표해 세계 각국의 유산 전문가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에 더 무게를 뒀다. 그는 “내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한국을 보여주는 자리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무대에서는 전통의 원형과 품위를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관객이 한국 전통을 처음 접하는 자리인 만큼 상징 하나도 신중하게 골랐다. “외국인들은 우리 전통을 잘 모르잖아요. 보면서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의 상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창작이 들어가더라도 전통에서 완전히 이탈해서는 안 되고, 전통의 품위와 격을 지키면서 현대와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의 여러 상징과 장면을 받아들이는 무대는 ‘백자 그릇’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공연을 돋보이게 하려고 장치를 겹겹이 쌓기보다, 서로 다른 예술이 각자의 형태와 소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비어 있는 듯 담백하지만 무엇을 놓아도 품어내는 백자의 미감이 무대 구성의 출발점이었다. 원 감독은 “깨끗한 백자 그릇에는 스테이크를 담아도, 김치를 담아도 다 잘 어울린다”며 “무대도 그런 백자 그릇이 됐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번 작업은 세계 속에서 달라진 한국 문화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제는 한국의 자연과 건축, 음악에 깃든 고유한 미학을 세계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외국 공연을 보면 우리는 왜 저렇게 못할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에서 자신 있게 ‘이런 것은 진짜 우리가 최고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동안 간과했던 것을 다시 보면서 생기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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