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동북아 교류사업 일환 오쿠노시마 방문
“안타까운 역사…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19일 오전 일본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앞바다의 작은 섬 오쿠노시마. 푸른 야자수가 하늘을 수놓고, 붉은 협죽도 꽃이 길게 늘어선 산책로에는 토끼들이 한가롭게 뛰어다녔다. '토끼섬'으로 더 유명한 이곳의 평화로운 풍경을 카메라로 담던 대전 만년고 3학년 이나희 양은 “오기 전 사진으로 봤을 땐 토끼가 뛰어놀고 예쁜 곳이라고만 생각했다”며 오쿠노시마에서 마주한 첫 인상을 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2026 동북아 역사문화 교류사업’ 첫 일정으로 만년고 한일역사교류 동아리 ‘휴먼링크’ 학생들은 이날 오쿠노시마를 찾았다. 새벽 1시 대전을 출발해 인천공항을 거쳐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다다노우미 항구에서 다시 페리로 3㎞를 건너기까지, 학생들은 밤을 꼬박 새우는 고된 여정을 거쳤다. 하지만 섬에 들어선 학생들의 눈빛은 되레 맑게 빛났다. 한낮의 찌는 듯한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여기까지 왔으면 제대로 보고 배워 가야 한다”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날 오쿠노시마는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지지만, 한때는 지도에서조차 지워졌던 일본군의 비밀 독가스 생산기지였다. 1927년 일본 육군은 오쿠노시마를 독가스 공장 부지로 결정했고,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까지 겨자가스(이페리트), 루이사이트 등 각종 화학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일본은 1925년 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의 서명국이었지만 개발과 생산은 계속했다. 공장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섬을 지도에서 삭제했고, 노동자들에게는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요했다.
학생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발전소 터였다. 지금은 콘크리트 골조만 남은 폐허지만, 당시에는 디젤 발전기를 가동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전쟁 말기에는 학도동원된 여학생들이 이곳에서 '후고(풍선폭탄)' 시험에도 동원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위험한 작업에 투입됐고, 독성 물질에 노출돼 평생 후유증에 시달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부는 전쟁범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관련 자료를 대부분 폐기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는 남아 있던 문서들마저 상당수가 소각되면서 진상은 오랫동안 묻혔다. 피해자 구제가 시작된 것은 1954년이었지만 충분한 보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독가스 공장의 존재가 일본 사회에 알려진 것도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사를 세상에 알린 건 학생들과 피해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자료 보존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갔고, 그 결과 오쿠노시마에는 독가스 자료관과 위령비가 세워져 오늘날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공간으로 남게 됐다.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들이 전쟁범죄에 동원됐다는 설명을 들은 학생들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3학년 양유진 양은 “저와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또 직접 그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사전 공부하면서 알던 것보다 직접 와서 보니 훨씬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학생들은 독가스 탱크를 놓았던 32개의 좌대가 남아 있는 노천 저장 탱크 터와 나가우라 독가스 저장고 터를 차례로 둘러봤다. 학생들은 토끼를 향해 휴대전화를 들다가도 독가스 저장시설 터 앞에선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화염방사기로 태워 검게 그을린 저장고 벽면을 직접 만져보며 당시의 흔적을 살폈다.
동아리를 지도하는 윤현미 교사는 "아이들이 역사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 탐구 주제를 정하고 현장을 찾아 배우는 과정이 주체적인 배움이라고 생각한다"며 "앎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 가장 교육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이번 답사를 위해 100여 쪽 분량의 자료집도 모두 직접 만들 만큼 진지하게 준비했다"고 말했다.
휴먼링크는 지난해 입시에 반영되지 않는 자율 역사동아리로 출발했다. 한국사가 필수 과목임에도 대학 전공 적합성 중심으로 운영되는 고교 동아리 문화 속에서 역사동아리가 소외되는 현실을 극복해 보자는 취지였다. 예상과 달리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고, 독도 지킴이 활동과 학교 광복 80주년 기념행사를 주도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올해는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로 확대돼 역사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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