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사에 불세출의 싱어송라이터로 기록된 송창식.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는 단 한 명의 가수”로 평가받는 그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이 나왔다. 국립정동극장과 아트로버컴퍼니가 공동 제작한 ‘피리 부는 사나이’다. 독보적인 리듬과 선율, 가사로 가장 한국적인 가요를 일군 송창식 음악으로 채운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낭만적인 제목과 달리 극은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 단체와 이를 분쇄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가수 지망생 영수의 이야기다. 도입부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역사 자료화면과 함께 경술국치 조서를 해설자가 읽으며 시대 상황을 소개하는 장면은 광복절 기념행사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시대를 발견하도록 하기보다는 작품이 먼저 기억해야 할 역사와 느껴야 할 감정을 정답처럼 제시한다.
곧이어 열린 무대는 힘찬 ‘고래사냥’ 합창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일본 순사가 2층 구조물에서 내려다보는 무대 위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거사를 모의한다.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독립운동가 아니면 일본 순사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영수가 가수가 되기 위해 찾아간 극장식 레스토랑 ‘빅토리’는 웨이터도 여가수도 모두 의열단원이다. 영수의 아버지와 형도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어린 시절 친구 대길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에 반발하며 일제 순사 다이키치가 됐다.
제작진은 관객에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묻고 싶었다지만 극 전개는 상투적이다. 이분법으로 나뉜 무대에서 영수의 선택은 한 인간의 복잡한 결단이라기보다 예정된 진영 이동에 가까워 보인다. 극 중 독립운동가들은 의열단이라는데 무대 위 모습은 대담하면서 치밀했던 역사 속 비밀결사를 떠올리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악역인 일제 철도국 담당자 다나카 또한 극의 개연성을 한층 떨어뜨리는 존재다. 일본 총독을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등장해서 계속 ‘빠가야로’를 외친다. 잔혹한 일제를 구현하기 위해 여러 악역의 속성을 한데 모은 상징에 가깝다. 관료인지 경찰이나 군대 지휘관인지 모를 정도로 권한과 역할도 모호하다. 게다가 일제 정책을 홍보하는 장면에선 총독부에 순응하면 언젠가 독립할 수도 있다고 연설한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일제 관료 입에서 나오기 힘든 내용이다.
극 후반부에선 독립운동에 무관심하던 주인공이 주변의 고통을 목격하며 독립투사로 거듭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친형의 변절과 밀고, 일제에 투신했던 친구의 뒤늦은 반성과 희생이 얹힌다. 너무도 익숙한 클리셰로 꽉 찬 무대다. 여기에 여러 공간을 구현하느라 배경 영상을 띄운 채 2층 고가 구조물 서너 개를 배우들이 끊임없이 옮기고 턴테이블을 돌리다 보니 장면 전환이 지나치게 분주하고 숨가쁘다.
주크박스 뮤지컬로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송창식의 노래다. ‘고래사냥’부터 ‘사랑이야’ ‘안개’ ‘왜 불러’ ‘담뱃가게 아가씨’ ‘나의 기타 이야기’ 등 주옥같은 명곡이 잇달아 무대 위에서 터진다. 청춘의 저항과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고래사냥’은 독립을 염원하는 군중 합창으로서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낸다. 기타 중심의 밴드 사운드에 브라스·스트링·목관을 얹은 편곡이 돋보인다.
뮤지컬 무대에서 민족 수난기의 애환을 담은 ‘희망가’를 생생한 가창으로 듣는 것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대적 배경뿐 아니라 상실과 체념, 희망이 뒤섞인 정서가 장면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배우들의 시원한 가창은 기대를 충족시키고, 노래와 결합한 군무도 흥겹거나 일사불란하다. 정찬수 작가는 송창식의 음악에서 아픔과 한(恨), 해학(諧謔)이 분리되지 않고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그 정서가 우리 민족이 가장 농밀하게 그것을 살아낸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다만 고문을 받던 주인공이 갑자기 “가나다라마바사.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노래는 너무너무 짧고”라며 ‘가나다라’를 부르는 장면 등 몇몇 장면에선 노래 특유의 정서가 무대 위 상황과 조화를 이루는지 의심스럽다. 명곡이 드라마를 움직이는 언어가 아니라 시대극 위에 잘못 얹힌 삽입곡처럼 들린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청춘의 기록으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묻겠다는 작품이었지만 관객이 답을 찾기도 전에 무대가 먼저 답을 알려주는 ‘답정너’여서 아쉽다. 국립정동극장에서 8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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