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 인수 등 몸집불리기 투자
SLL 상장 실패로 중앙그룹 위기
스카이캐슬·이태원 클라쓰 등 히트
중앙그룹 SLL 출범 초반 성장가도
해외 제작사까지 사들이며 부푼 꿈
콘텐츠사 주가 급등도 착시 부추겨
OTT 투자 속도 조절 속 시장도 급변
SLL, 상장 불발 대비도 없어 위기 자초
현장, 투자위축·제작편수 감소 악순환
국내 글로벌플랫폼 육성 등 변화 우선
2023년 5월 홍정도 중앙그룹 부회장은 계열 콘텐츠 제작사 SLL의 비전을 설명하며 세계 최대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 디즈니를 모델로 제시했다. SLL이 ‘부부의 세계’(2020), ‘이태원 클라쓰’(2020) 등을 연이어 흥행시키며 국내 대표 콘텐츠 제작사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전년도에는 향후 3년간 콘텐츠 제작에 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다. 중앙그룹 지주사 중앙홀딩스와 JTBC 등 주요 계열사 5곳이 지난달 15일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같은 달 30일 법원은 JTBC의 자율구조조정지원(ARS) 프로그램 신청을 받아들여 회생절차 개시 여부 결정을 미뤘고, 나머지 4개사에 대해서는 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업계는 이번 사태를 단순히 개별 기업의 경영 실패로만 보지 않는다. ‘K콘텐츠 전성기’라는 낙관론 속에서 형성된 착시가 무리한 베팅을 유도했고, 그 부담이 시장 조정 국면에서 어떻게 청구서로 되돌아왔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다. 업계에서 “K콘텐츠의 외화내빈이 드러났다”, “세계적인 흥행작은 나왔지만 산업 생태계는 오히려 취약해졌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공격적 투자와 관리 실패 ‘부메랑’
JTBC는 출범 초기부터 공격적인 콘텐츠 투자 전략을 펼쳤다. 매출을 웃도는 제작비를 투입했고, 정상급 배우와 작가, 연출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성과는 뚜렷했다. ‘스카이캐슬’(2018),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JTBC는 지상파와 tvN을 위협하는 콘텐츠 사업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성공과 함께 비용 부담도 빠르게 커졌다. 방송 광고시장이 정체된 가운데 콘텐츠 투자 규모는 계속 확대됐다.
2018년 넷플릭스가 한국 상주팀을 구성하고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본격화한 이후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들이 경쟁적으로 제작비를 끌어올렸고, 주 52시간 근무제가 제작 현장에 정착하면서 제작비 하방 역시 높아졌다.
그럼에도 중앙그룹은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SLL 상장을 목표로 몸집을 키웠다. 비에이엔터테인먼트(영화 ‘범죄도시’, ‘악인전’), 클라이맥스 스튜디오(‘D.P.’,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튜디오슬램(‘흑백요리사’, ‘싱어게인’), 미국 제작사 윕(wiip) 등을 인수하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다.
시장 분위기는 낙관 일색이었다. 2019년 ‘킹덤’에 이어 2021년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성공을 거두면서 K콘텐츠가 장기간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했다. 2019년까지 연간 100편 안팎이던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는 130∼140편 수준으로 늘었고, 스튜디오드래곤, 초록뱀미디어, 콘텐트리중앙 등 콘텐츠 기업들의 주가도 급등했다.
위기의 출발점은 SLL 상장 실패였다. 2021년 SLL은 프리IPO(상장 전 지분투자)를 통해 약 4000억원의 외부 투자금을 유치했다. 그러나 이후 시장은 급변했다. 글로벌 OTT들이 투자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공급 과잉 국면에서 높은 협상력을 바탕으로 제작비 통제에 나섰다. 콘텐츠 제작 편수는 감소세로 돌아섰고,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급등했던 콘텐츠 기업들의 기업가치도 대부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SLL 상장은 무산됐고, 투자금 상환 부담은 현실화했다.
SLL은 최근까지도 흥행작을 꾸준히 내놓았고, 레이블들은 다양한 장르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정점에 있을 때 장밋빛 전망을 전제로 도박에 가까운 투자를 단행했고, 시장이 꺾였을 때 대비책이 없었다는 점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화려한 성공’에 가린 K콘텐츠 위기
‘대한민국의 디즈니’를 꿈꾸며 시작된 대규모 투자는 지금 K콘텐츠 산업이 마주한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성공이 한국 영상 콘텐츠 산업 전반의 기초 체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콘텐츠 경쟁력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과 재무 건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번 위기를 통해 드러났다는 평가다.
이번 사태는 K드라마의 글로벌 경쟁력을 과대평가해 온 현실도 보여준다. K드라마가 세계적 인지도를 확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미국 콘텐츠와의 격차는 크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제한적이다. 몇몇 작품의 화려한 성공에 기대 산업 전반이 성장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기에는 국내 제작 생태계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한국 드라마 산업이 이미 심각한 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투자 위축과 제작 편수 감소, 다양성·실험성 약화라는 ‘악순환’이 이미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2023년 이후 투자 위축으로 제작 현장의 활력이 급격히 떨어진 가운데, ‘JTBC 사태’가 겹치면서 중견 제작사와 프리랜서 스태프 등 산업 생태계 전반에 큰 충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제작사와 종사자를 위한 긴급 안전망을 마련하고,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 방식과 정책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은규 한국드라마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에이드허브 대표)은 국내 드라마 산업이 이미 2023년부터 투자 위축으로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투자금을 구하지 못해 대본이 캐비닛 속에 묵고, 40대 연출가들조차 일이 없어 쉬는 등 업계의 생동감이 사라지고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위원장은 JTBC가 그동안 “드라마를 지상파 수준으로 유일하게 투자한 사업자”였다며, 넷플릭스의 공격적인 투자 확대에 맞춰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투자를 늘렸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착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톱클래스 제작사를 제외한 중견 제작사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 상태”라고 일침했다.
배대식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총장은 “현재 K드라마 시장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제작 현장은 곪아 들어가는 ‘빛 좋은 개살구’”라며 “제작비용 상승에 따른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유통·제작비 정책 지원과 국내 글로벌플랫폼 육성 등 큰 틀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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