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만개한 순간, 에너지가 극점에 달한 몸, 파도의 포말
강렬한 흑백의 대비와 자연광마저 계산된 듯한 빛의 사용
세상의 잣대가 아닌, 본질 그 자체를 봤는지 묻는다
우리는 대상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꽃을 보면 꽃말을 떠올리고, 몸을 보면 성별을, 얼굴을 보면 나이와 인종을 읽는다. 사물보다 먼저 이름을 읽는 데 익숙한 우리는 존재 자체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대상일까, 아니면 그 위에 덧씌워진 의미일까.
20세기 중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1946∼1989)의 개인전 ‘형태의 시학’(2026년 6월9일∼7월19일)이 국제갤러리 한옥에서 열리고 있다. 메이플소프는 펑크 문화와 BDSM(성적 역할극)을 비롯한 뉴욕의 하위문화가 들끓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술과 외설을 넘나드는 사진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파격과 검열, 퀴어 담론 속에서 주로 회자되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간의 인식을 넘어 형태를 통해 존재를 응시했던 메이플소프의 시선에 주목한다.
◆차갑고도 뜨거운
전시는 도발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 대신 정물 사진과 형태, 실루엣이 강조된 인물 사진을 전면에 내세운다. 강렬한 흑백의 대비와 정적이고 신화적인 분위기, 그리고 자연광마저 완벽하게 계산된 듯한 극적인 빛의 사용이 공통적으로 감지된다. 메이플소프에게 사진은 형상을 빚어내는 행위였다. 조각가가 돌을 다듬어 형상을 꺼내 보이듯, 그 역시 우연을 기록하는 대신 존재가 가장 자기 자신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정교하게 포착해 내고자 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메이플소프의 작업에 대해, 비평가 케이 라슨은 ‘뜨거운 고전주의(hot classicism)’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붙였다. 미술사에서 고전주의적 형식은 흔히 절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차가운’ 미학으로 이해된다. 메이플소프 역시 프레임의 분할, 대칭과 균형, 조명의 각도에 이르기까지, 강박에 가까운 완벽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엄격한 틀 안에 담아낸 것은 곧 시들어버릴 꽃과 바스러질 파도, 그리고 흑인 남성의 나체나 남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 등 당대 사회가 주변부로 밀어냈던 존재들이다. 메이플소프는 취약하면서도 강렬한 생명과 욕망을 품은 이들을 마치 고전 조각을 다루듯 완벽하게 통제된 질서 안에 놓았다. 견고한 형식은 대상을 긴장시키고, 대상은 다시 그 형식을 뒤흔든다. 메이플소프의 작업에서 차가운 조형적 절제는 역설적으로 존재의 욕망을 가장 뜨거운 상태로 정제해 낸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완벽한 형식을 필요로 했을까. 메이플소프는 꽃과 남근을 찍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무엇을 찍느냐’보다, 대상이 지닌 본연의 성질이 ‘가장 충만하게 발화되는 형태’를 붙잡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꽃이 가장 꽃답게 만개한 순간, 파도의 포말이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순간, 몸의 에너지가 극점에 이른 순간. 존재가 가장 뜨겁게 드러나는 찰나다. 관객은 대상이 너무나 ‘그 자체로’ 포착된 모습 앞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서게 되고, 피사체의 외형 너머 존재론적 층위에 이르게 된다. 치밀하게 계산된 질서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과 생명력은, 사회적?도덕적 범주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어떠한 물리적 속성이나 감각을 깨운다.
‘Thomas(토마스)’에서는 ‘충만한 아름다움’이 신화적 형상으로 구현된다. 고전 조각을 연상시킬 만큼 이상적인 비례의 흑인 남성이 원형 구조물 안에서 육체의 역동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팽팽하게 응축된 근육은 존재의 밀도가 가장 높아진 순간을 단단한 형상으로 고정한 모습이다. 고개를 숙인 채 힘을 끌어모은 자세는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우리즌(Urizen)’처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설계자를 떠올리는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형식 안에 속박된 존재처럼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흑인 남성의 누드는 사회적 정체성을 벗어난 보편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덩어리진 것과 풀려나는 것
메이플소프의 고전적 화면 속 조형적 대비는 피사체의 나열과 배치, 중첩을 통해 확장된다. 전시장에는 알과 깃털, 화병과 꽃, 정지된 조각상과 움직이는 다리 등, ‘덩어리진 것’과 ‘풀려나는 것’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꽃은 펼쳐지고 화병은 붙든다. 근육은 응축되고 몸짓은 뻗어나간다. 알은 닫혀 있고, 깃털은 이미 풀려난 존재로 자리한다. 안으로 수렴되는 힘과 밖으로 풀려나는 힘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공존한다.
‘Calla Lily(칼라 백합)’는 칼라 한 송이를 거대하게 확대하여 찍은 사진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그 꽃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검은 공간이다. 메이플소프는 배경을 완전히 지워냄으로써 하나의 무대 같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텅 빈 공간은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무엇이든 가능한 충만한 공간으로 드러난다. 덩어리진 꽃과 그로부터 뻗어 나온 얇은 잎줄기, 흑과 백, 채움과 비움의 대비는 긴장과 균형을 동시에 생성하며 화면을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엮어낸다.
메이플소프의 작업에서 ‘덩어리와 풀려남’은 들숨과 날숨 같은 근원적 리듬으로 작동한다. 엄격한 가톨릭 환경 속에서 성장해 퀴어 예술가로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그의 생애를 떠올린다면, 그의 삶을 가로질렀을 ‘억압과 해방’이라는 거대한 긴장의 구조와도 연결된다. 결국 이러한 긴장감은 단순히 조형적 장치에 그치지 않고, 메이플소프가 세계를 이해하고 형상을 조직하는 방식이 아니었을지 짐작해본다.
◆걷어낸 자리에서
결국 메이플소프에게 치밀하게 계산된 형식은 존재를 가장 충만하게 드러내는 정교한 장치였다. 어쩌면 그는 형식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것만이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생명을 가장 단단한 형태 안에 붙잡아 둠으로써, 그 안의 존재를 도리어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무릇 대상의 본질은 사회가 가둬두는 범주보다 넓기 때문에, 메이플소프는 피사체 위에 덧씌워진 이름과 의미를 걷어내기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리하여 꽃은 꽃말이 아니라 생명으로, 금기시된 정체성은 편견을 넘어 하나의 존재로 환원된다.
시대를 뒤흔들었던 그의 작업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까닭은 단지 전위와 충격 때문만이 아니라, 형식을 뚫고 나오는 아름다움을 통해 기어이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새로운 대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되묻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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