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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모근 하나 뽑았을 뿐인데…한국 경마판 뒤흔든 ‘세계 1위 DNA’의 비밀 [권준영의 머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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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영 기자 kjykj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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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씨수말 ‘닉스고’에 몰린 생산농가의 선택
혈통·DNA·AI가 바꾸는 한국 경마 산업
교배료 수억원, 북미 종마시장처럼…혈통도 데이터도 ‘투자 자산’
모근 DNA 분석부터 AI 육성까지…‘감’ 대신 데이터로 뛰는 경마

말의 모근 한 가닥이 세계 챔피언을 만들 수 있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마의 잠재력을 가늠하는 일은 혈통과 조교사의 경험, 오랜 현장 감각에 크게 의존했다. 하지만 지금은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망아지의 모근에서 DNA를 추출해 유전 정보를 분석하고, 훈련 과정에서는 심박수와 속도, 걸음 수까지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한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인공지능(AI)과 결합해 말의 성장 가능성과 경기력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한국 경마도 이제 혈통과 경험을 넘어 유전체와 데이터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이 변화의 중심에는 올해 국내 씨수말로 활동을 시작한 세계 정상급 경주마 ‘닉스고(Knicks Go)’가 있다.

 

한국마사회는 닉스고를 미국 경매시장에서 8만7000달러(약 1억3000만원)에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유망주였던 닉스고는 이후 세계 경마사를 새로 썼다. 2021년 세계 경주마 랭킹 1위에 올랐고, 통산 25전 10승, 총상금 925만달러(약 142억원)를 기록하며 세계 최고의 경주마로 이름을 알렸다. 2022년 은퇴 후 미국 켄터키주에서 씨수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올해 국내에서 새로운 교배 시즌을 맞았다. 그 첫 번째 성적표는 한국 경마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국마사회 제주목장에 따르면 올해 교배지원 규모는 총 274두였다. 이 가운데 닉스고는 126두와 교배하며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지난해까지 가장 많은 교배를 기록했던 씨수말 ‘한센’(102두)을 단숨에 제치고 국내 최고 인기 씨수말에 올랐다.

 

이 숫자는 단순한 인기 경쟁의 결과가 아니다. 국내 생산농가 절반 가까이가 세계 랭킹 1위 출신 씨수말을 선택했다는 것은, 앞으로의 경쟁력이 혈통뿐 아니라 검증된 유전적 가치와 데이터에 있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시장의 선택이다.

 

경마 산업에서 씨수말은 단순히 번식을 위한 말이 아니다. 미래의 경주마를 만드는 ‘유전자 자산’이다. 생산농가가 교배를 결정하는 순간 선택하는 것은 눈앞의 씨수말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자마들의 잠재력이다. 씨수말의 경주 성적과 혈통은 물론 자마들의 상금, 경매 낙찰가, 거리 적성까지 모든 데이터가 그 미래 가치를 결정한다.

 

북미 종마시장은 이미 혈통과 데이터로 씨수말의 가치를 평가하는 대표적인 ‘유전자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북미 리딩사이어들이다. 2026년 북미 리딩사이어 상위권인 ‘낫 디스 타임(Not This Time)’과 ‘인투 미스치프(Into Mischief)’의 회당 교배료는 각각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에 달한다. 이들의 가치는 높은 교배료에 그치지 않는다. 자마들이 벌어들인 연간 상금(Progeny Earnings)은 각각 1879만 달러와 1642만 달러에 이른다. 결국 씨수말의 혈통은 단순한 번식 자원이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산업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이 같은 흐름은 국내 씨수말 시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올해 교배지원 실적은 닉스고가 126두로 가장 많았고, 한센(102두), 언캡처드(70두), 클래식 엠파이어(41두)가 뒤를 이었다. 씨수말 간 선호도는 뚜렷하게 갈렸다. 결국 생산농가들은 혈통은 물론 유전적 경쟁력과 시장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미래 가치가 높은 씨수말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누적 상금만으로 씨수말의 경쟁력을 판단할 수는 없다.

 

국내 씨수말 순위를 보면 9위 어플릿익스프레스는 출전한 자마가 26두에 불과하지만 출전횟수당 평균상금은 약 1392만원으로 한센(약 627만원)을 크게 웃돈다. 표본은 적지만 개체당 성과는 오히려 더 높았다는 의미다. 씨수말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자마를 배출했는지뿐 아니라, 자마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는지까지 함께 평가받는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구글의 AI Gemini 생성 이미지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구글의 AI Gemini 생성 이미지

이러한 변화는 한국 경마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마사회 말산업연구소는 ‘글로벌 능력마 조기 발굴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데이터 기반 육성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핵심은 모근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체를 분석하고, 이를 훈련 데이터와 결합해 경주마의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을 정밀하게 예측하는 것이다.

 

분석된 유전체 정보는 거리 적성과 경주 특성 등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이후 훈련 단계에서는 심박수와 훈련 속도, 분당 걸음 수 등 다양한 생체 데이터를 축적한다. 이렇게 확보한 유전체 정보와 훈련 데이터를 결합해 개체별 맞춤형 훈련을 설계하고, 잠재력이 뛰어난 경주마를 조기에 발굴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물론 DNA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출발점일 뿐이다. 실제 경주 성적은 조교 과정과 건강 상태, 성장 환경, 기수와의 호흡, 경기 당일의 컨디션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달라진다. 유전체 분석은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과학적 도구로 활용된다.

 

그럼에도 시장은 이미 미래 가치에 먼저 베팅하고 있다. 현재 성적만 놓고 보면 한센이 앞선다. 올해 출전한 자마 152두가 벌어들인 총상금은 약 36억 원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반면 올해부터 국내 씨수말로 활동을 시작한 닉스고는 아직 자마들의 본격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단계다.

 

하지만 생산농가들의 선택은 달랐다. 이미 실적이 검증된 씨수말보다 세계 랭킹 1위 혈통이 지닌 미래 성장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이다. 아직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잠재력이 더 크다고 판단한 셈이다. 마치 스타트업에 투자하듯,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에 먼저 자금을 투입한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은 지난 10년간 국내 씨수말 시장 변화와 맞닿아 있다. 한국마사회의 교배지원 분담률은 2016년 28.3%에서 지난해 18.4%로 낮아졌고, 민간의 역할은 꾸준히 확대됐다. 씨수말 시장 역시 과거의 공급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다. 생산농가가 혈통과 성적, 시장성을 기준으로 냉정하게 비교·선택하는 경쟁 시장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흐름이다.

 

한때 경마는 ‘좋은 말을 기다리는 산업’에 가까웠다. 이제는 다르다. DNA는 잠재력을 읽고, 데이터는 성장 과정을 기록하며, 과학은 그 가능성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올해 닉스고에게 몰린 126두의 선택은 단순히 세계 챔피언 출신 씨수말 한 마리의 인기를 보여주는 숫자가 아니다. 국내 생산농가의 선택 기준은 이미 혈통을 넘어 데이터와 미래 가치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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