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이 신작 ‘효명(국립극장 해오름, 6월23∼28)’에서 빈곤한 주제의식과 허술한 서사·무대로 제작 역량 바닥을 드러냈다. ‘트로이의 여인들’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리어’ ‘심청’ 등으로 기대 수준이 높아진 창극 팬을 실망시킨 공연이었다.
애초 이 작품은 예술을 통해 시대의 변혁을 꿈꾼 효명세자를 재조명하겠다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세도정치 아래 흔들린 왕권과 궁중 질서를 예악(禮樂)정치로 다시 세우려 했던 젊은 왕세자. 궁중정재와 현대무용, 창극을 결합해 그가 꿈꾼 새로운 세계를 오늘의 무대언어로 되살리겠다는 구상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무대에선 ‘효명’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매력과 예악의 정치적·미학적 의미를 체감하기 힘들었다. 창극과 무용의 장르적 결합도 한 무대 안에서 유기적으로 융화되지 못했다.
◆경사로에 눌린 무대, 실패한 미장센
국립창극단 이번 신작에서 먼저 두드러진 문제는 실패한 미장센이다. 공연은 최고 높이 3.4m 남짓한 경사로가 얹힌 무대에서 내내 이뤄졌다. 땅덩어리를 상징한다지만 암반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이 왜 효명과 궁중 세계를 상징해야 하는지는 관객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표였다. 조선 궁중의 의례적 질서나 공간성과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 위에서 옛 궁중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곤룡포와 관을 갖춘 배우들의 연기는 소외감을 일으켰다. 게다가 출연진은 경사로에 난 굴 모양의 출입구를 통해 무대를 오르내려야 했다.
그런 무대 위에서 군무와 궁중정재의 선은 확장되기보다 눌리고 갇혔다. 효명이 새 질서를 세우려 했던 궁중의 세계는 위엄 있게 펼쳐지는 대신 무대의 물리적 제약 속에 옹색하게 축소됐다. 무대 위를 떠도는 대형 원반 역시 효과적이지 않았다. 여러 영상을 띄우다가 해와 달을 상징하는 한 쌍으로 배치되며 일월오봉도를 연상시키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시야를 답답하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후반부에 등장한 팔작 기와지붕 구조물 또한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왕실 연향의 화려함, 세도정치의 균열, 예악 질서의 재구축이라는 작품의 핵심 개념을 시각적으로 통합하지 못한 무대였다.
◆통치의 언어에서 사적 취향으로 격하된 예악정치
더 큰 문제는 효명의 서사와 주제의식이다. 효명세자가 예악을 통해 조선을 바꾸려 했다는 전제를 내세우지만, 그 예악정치가 무엇인지 무대 위에서는 단순화된다. 예(禮)로 질서를 세우고 악(樂)으로 공동체를 조화롭게 한다는 유교 정치사상의 핵심은 복잡한 권력 질서와 의례 체계, 왕권의 상징적 회복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극 중에선 정쟁만 일삼는 신하들이 왕이 주재하는 연회에서 술 한잔하며 춤을 보고 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축소된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과 달리 이 작품에선 효명이 직접 춤을 추는데 그 이유 역시 정치적 행위나 의례적 실천으로 깊어지기보다 자기해방과 자기표현의 차원에 머문다. 국립창극단장 유은선, 연출 임지민과 공동집필한 이만희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효명은 사대부들과 잘 지내며 개혁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아무리 싫어도 얼굴을 맞대고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예악정치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효명은 답답한 삶에서 춤으로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라며 “신하들에게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단련됐는지 과시하는 정치적 행위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언급했다. 역사 속 효명은 안무가이지 무용수는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 왜곡 시비까지 붙을 수 있는 무리한 설정이다.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허구는 인물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지켜야 할 선도 사라진 것이다.
즉석에서 세자를 비판한 의금부도사를 장악원 책임자로 중용하고 과거 부정 카르텔이 세자 암살에 나선다는 설정도 극적 파격이라기보다 개연성의 균열에 가깝다. 요절할 운명인 효명 서사에 내의원을 등장시켜 독살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도 위험하다. 효명 독살설은 당대에 회자한 흔적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무리한 설정인 데다 결말이 제대로 회수되지도 않는다.
이 밖에도 살아 있는 국왕을 사후의 묘호인 ‘순조’로, 왕비를 시호인 ‘순원왕후’로 극 중에서 호칭하는가 하면 뜬금없는 예능방송식 유행어와 현대식 속어, 부적절한 성인지 대사 등으로 관람 호흡을 수시로 깨트렸다.
◆흔들린 춤과 창의 결합
의욕적으로 추구한 춤과 창의 결합도 미흡하다. 국립창극단을 나와 홀로서기 중인 유태평양은 작창을 맡아 빼어난 실력을 보여줬다. 물오른 창극단원들의 노래와 춤도 한 점 아쉬움이 없다. 관복입은 신하들의 좀비 같은 행진 등 김재덕 안무 역시 시각적 에너지가 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궁중정재의 절제된 미학, 효명의 예악정치, 창극의 소리 중심 구조와 얼마나 조화를 이뤘는지는 의문이다. 신선함과 괴이함 사이에서 작품은 자기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무대가 이렇다 보니 객석도 평단도 냉담했다. 국립극장 홈페이지 관객 게시판에서 한 관람객은 “도저히 빈말조차 나오지 않는 참담한 공연”이라며 “창극의 ‘창’도, ‘극’도 점차 사라져 가면서 이것저것 욕심은 나고 그 결과 아무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작금의 실태”라고 비판했다. 극의 기본인 서사의 개연성은 무너졌고 어처구니없는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단원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개탄했다.
김태희 무용평론가는 ‘효명세자는 무용사적으로 짧은 기간 안에 많은 정재를 만든 중요한 인물’이라며 “이번 작품은 그 상징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궁중정재와 컨템포러리한 움직임을 결합하려 했다면 전통적 기반을 더 정확하게 가져갔어야 했다며, 서사적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작품의 메시지가 흐려졌다고 지적했다.
역사학자 심용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스토리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매우 아쉬웠다. 1부에 나온 거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거나 적합한 해석이라 보기 어렵고 2부에 표현되는 메시지적인 부분 또한 모호하거나 올드했다”고 평가했다.
‘효명’의 실패는 단순히 한 작품의 완성도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국립창극단이 최근 계속 실험해온 ‘창극의 확장’이라는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효명세자’라는 매력적인 인물과 그의 이상 예악정치가 낭비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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