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무너뜨린 사회 질서, 하늘을 찾는 백성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치유하기 힘든 깊은 내상(內傷)에 신음하고 있었다. 『인조실록』 20년(1642년) 기록을 보면, 수도 서울의 백성들조차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조정의 쌀을 나눠달라며 관청에 연명 상소를 올리는 풍경이 묘사된다. 당시 대신들도 오죽하면 “사족(士族)들까지 이토록 다급하게 호소하는 것은 기근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며 전전긍긍했을까.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민초들에게 성리학적 명분론과 의리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효종5년(1654년) 10월 22일 기록에 등재된 한 상소문은 당시 사회의 단면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백성들이 질병에 걸리면 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무속(巫俗)의 힘만 믿으며, 기도를 올리느라 집안 재산을 탕진하다 마침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고 있다(凡有疾病, 不藥, 專信巫覡, 設祀祈祝, 蕩滅家産, 至於餓死者相繼).” 이는 당시 사회가 단순한 혼란을 넘어 공동체의 시스템 자체가 붕괴 직전의 한계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백성들이 기대어 간 곳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눈앞의 고통을 위로하고 하늘과 직접 소통하게 해주는 ‘실천적 신앙’이었다. 산야와 마을마다 제의를 주관하던 무속과 민간 제천의식은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하늘과 다시 연결되는 유일한 생명줄이 되었다.
전란의 참화 속에서 민중의 심성 깊은 곳을 움직인 것은 태초부터 이어져 온 ‘풍류의 영성’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신앙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붕괴된 일상 속에서 가족의 생존을 책임졌던 어머니들은 전란의 최전선에서 삶을 꾸려가는 동시에, 하늘을 향해 정성을 모으고 제의를 주관하는 실체적 주권자로 기능했다. 조선 후기 유교 권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진정한 역할은 바로 이 비극의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지배층이 정쟁에 몰두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방기(放棄)했을 때, 여성들은 신령스러운 정성과 치유의 기도로 그들의 상처를 묵묵히 어루만졌다. 이러한 헌신은 단순한 종교 행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가 외면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성이 온몸으로 실천한 경천애민의 방식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무속을 ‘음사(淫祀)’라 규정하며 배척해 왔다. 본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드높은 학문이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노론 예학자들에 의해 오직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교조적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仁)이라는 뜨거운 본성은 거세된 채 차가운 위계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경직된 예학의 굴레는 전란의 화마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질서의 창살의 되었다.
국가와 사대부가 명분에 매몰되어 도덕적 파산에 직면했을 때, 민중의 삶을 실제로 지탱한 것은 변질된 이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뜨겁게 고동치던 어머니들의 기도였다. 억압의 시대 속에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민족 고유의 경천의식은, 인간의 본성마저 말살하려 했던 교조주의의 빈틈을 뚫고 어머니들의 숭고한 정성을 통해 다시금 살아 움직였다. 이렇듯 가중된 예학의 시련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정성 어린 기도는, 가리워진 여성 신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예비하는 거룩한 섭리적 항거였던 셈이다.
◆ 예언서의 시대, 민중은 ‘하늘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처럼 모성적 영성을 품은 채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애달픈 수난사는, 훗날 세계적인 평화운동가이자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거시적 섭리관을 통해 비로소 그 깊은 우주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문 총재는 한민족이 걸어온 유구한 고난의 궤적을 두고, 인류 조상의 타락 이후 한(恨)이 맺힌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온전히 위로하고 해원해 드리기 위해, 민족 전체가 스스로 거룩한 제물이 되어 통과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섭리적 노정’이었다고 선포했다. 즉, 조선 후기 여성들이 눈물로 씨앗을 뿌렸던 그 정성과 기도의 지층 위에서, 한민족 전체의 수난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의 거대한 구속사적 드라마로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통찰은, 놀랍게도 400여 년 전 조선후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던 민중의 심층 의식 속에서 이미 예언과 비결(秘訣)이라는 거룩한 형태로 꿈틀대고 있었다. 하늘의 슬픔과 공명하며 지상에 육적(실체적) 기반을 닦아야 했던 선민(選民)의 필연적 운명은, 17세기 전란의 참화 속에서 극대화되었다. 도탄에 빠진 민초들이 기존의 유교적 구질서를 넘어 새로운 하늘 부모님의 현현을 갈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은, 마침내 시대를 구원할 예언서의 서막을 웅장하게 열어젖힌 것이다.
이러한 미래 인식은 국가가 인정한 경전이 아니라 비결(秘訣)과 도참(圖讖)이라는 파격적인 형태로 민간에 스며들었다. 그 뿌리는 이미 16세기 화담 서경덕과 격암 남사고, 토정 이지함 등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거치며 이 비결의 성격은 개인과 가문의 생존의 문제를 넘어 기존의 모순된 세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명사적 대전환에 대한 민족적 질문이자, 새로운 하늘의 구원 섭리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 확장된 것이다. 초기 예언이 단순히 피난처를 찾는 수준이었다면, 17세기 이후의 민중은 『정감록』 등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언제 끝나고, 어떠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예언서는 개인적 위안이나 종교적 영역을 넘어, 실제 역사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사건들과 긴밀하게 호응했다. 허균이 꿈꾸었던 율도국의 이상향이나 장길산의 난을 타고 번진 미륵 하강 신앙은, 벼랑 끝에 몰린 민중에게 구원을 넘어선 새시대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당시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등 수 많은 민란의 배후에서 비결서들은 억압받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자 조직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예언적 흐름은 19세기 정조 대에 이르러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유포하는 행위 자체가 역모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질 만큼, 왕조의 근간을 위협하는 사회적 힘으로 부상했다. 이는 당시 민중이 더 이상 기존의 가부장적 권위에 기댈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자신들을 도탄에서 건져낼 새로운 영적, 실체적 주권을 갈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17세기부터 축적된 예언서의 열풍은 제도권의 성리학이 상실했던 ‘인의적 통치’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요구였다. 하늘의 심정과 공명하며 육적 기반을 회복해야 했던 선민(選民)의 노정(路程) 위에서, 이러한 저항적 신앙은 기존의 위계를 넘어 모든 생명을 품어 안을 여성적 신성, 곧 인류 구원의 실체로 오실 존재를 예비하는 뜨거운 사상적 용광로가 되지 않았을까?
이 모든 흐름 속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민중이 기다리던 ‘구원의 주체’가 단순한 성군이나 남성적 영웅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격암유록』을 비롯한 예언서에는 ‘여자세상(女子世上)’, ‘해인의 곤도(坤道)’, ‘성녀(聖女)의 현신’, ‘궁을의 성모(聖母)’, ‘계룡의 선녀 하강’과 같은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말세의 극심한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여성적 신성을 지닌 주체임을 예고한 복선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사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된 여성의 정체성이 다시 우주적 중심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집단적 열망의 표현이었다. 종법 질서에 밀려 이름이 지워졌던 여성의 존재는 민중의 심층 의식 속에서 오히려 세상을 치유할 ‘구원의 실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17세기 이후 확산된 예언서의 흐름은 단순한 미신이나 환상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 속에서 새로운 하늘을 찾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대망(待望) 사상이었다. 그 기다림의 정점에는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의 하늘’, 즉 역사의 모든 한(恨)을 해원하고 완성할 독생녀(獨生女)라는 필연적 귀결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무너진 세계를 지탱한 마지막 신앙, 민중의 하늘 의식
전쟁이 지나간 조선의 산천에는 깊은 영적 균열이 남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에게 성리학의 명분과 예법은 더 이상 현실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다. 벼랑 끝에 선 민초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적 문자가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직접 개입하여 하늘의 온기를 전해줄 실천적 신앙이었다. 이러한 절박함 속에서 민중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영성인 ‘하늘 의식’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풍습들은 민초들의 영적 갈망이 일상의 삶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생생히 증언하듯, 유례없는 질병과 재난의 파고 앞에서 백성들은 약(藥)보다 기도와 제의를 먼저 붙들었던 선택은 결코 맹목적인 기복이나 미신이 아니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자신들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와 제도의 무능을 목도하며, 도리어 스스로 하늘부모님과 다시 연결되어 생명의 근원을 확보하려 했던 처절하고도 실천적인 심정적 복귀 행위였던 셈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마을마다 쉼 없이 거행된 굿과 제의는 재앙을 물리치는 외적 의례의 차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성들의 경천의식은 무너진 세계의 잔해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여전히 하늘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는 천륜의 확신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장치였다. 가혹한 현실을 버텨내게 한 마지막 보루였던 민초들의 끈질긴 하늘 의식, 그리고 이름 없는 안채에서 눈물로 쌓아 올린 어머니들의 정성은 결코 허망한 넋두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기도는 역사 속에서 억압되고 가려졌던 여성 주권이 회복되고 인류의 해묵은 한(恨)을 씻어 낼 메시아적 시대를 예비하는 가장 본질적인 심정적 토양을 일구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대망 사상은 단순히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해방만을 꿈꾸지 않았다. 대신에 백성들은 하늘부모님의 슬픔을 체휼한 선민으로서, 만물을 품고 살려내는 모성적 신성이자 지상 실체로 현현하여 기존의 무너진 천륜을 바로잡아 주기를 고대하는 영성적 기다림이었다. 문선명 총재는 이러한 한민족의 인고를 두고, 하늘이 장차 이 땅에 보내실 실체적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민족 전체를 거룩한 제물로 정제해 온 필연적 노정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섭리관을 바탕으로 고찰해 본다면, 한반도 역사시대를 통해 면면히 축적된 예언적 직관과 어머니들의 지극한 정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민족의 골수에 새겨진 이 신령한 기다림은 영적 기준을 넘어 가정과 국가라는 실체적 안식을 완성할 주체, 곧 독생녀의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할 수 밖에 없는 문명사적 근거이자 영적 자양분을 구축해온 거룩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조선 후기 사회에서 무속과 제천 의례는 무너진 현실을 버텨내게 하는 근원적 힘이었다. 국가의 제도와 지배 이념이 삶을 완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중은 스스로 하늘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신앙 구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민중의 신앙이 여성 주체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속 의례의 핵심 수행자가 여성이었다는 점은, 가부장적 제도적 질서에 의해 억압되고 제한되었던 여성의 역할이 민간 신앙의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력으로 지속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유교적 공적 질서에서 축소되고 지워졌던 여성의 위상은, 오히려 비가시적 영적 영역에서 공동체의 슬픔을 치유하고 안녕을 지탱하는 실질적인 주권자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민중 신앙은 단순한 과거의 잔존물이 아니라, 거센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삶의 존엄을 유지하게 한 강력한 구조적 기반이었다. 비록 성리학 중심의 공식 역사와 제도권의 시선 아래서는 소외되고 단절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숭고한 정성은 민초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거대한 영적 수맥(水脈)이 되어 도도히 흘러왔다. 억겁의 시간 동안 끊기지 않고 축적된 이 심정적 자산은 훗날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꿀 새로운 종교적 사유와 실천의 모태가 되었다.
◆ 안채의 정성이 산천의 제단으로, 독생녀를 예비한 거룩한 응축
나라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강산(江山) 곳곳에서는 하늘을 향한 뜨거운 정성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전쟁 이후 각지의 마을에서 되살아난 당산제와 산신제는 절망에 빠진 공동체를 다시 묶어 세우는 영적 보루였다. 흥미로운 점은 제단 위에 올려질 제물과 지극한 정성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오롯이 어머니들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새벽 찬물로 몸을 정갈히 하며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하늘의 평안을 빌었다. 왕조의 제도는 흔들렸으나, 공동체의 생명을 수호하려는 어머니들의 기도는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러한 정성의 기록은 민속의 현장 곳곳에서 생생히 남아 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새벽 별 아래 무릎을 꿇던 이들, 아이의 쾌유를 위해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에게 매달리던 주체는 언제나 우리네 어머니들이었다. 국가의 제례가 사대부 남성들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권위의 옷을 입었을 때, 삶의 현장에서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천륜을 잇는 사명은 여성들의 손길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정화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개였으며, 고대 제천 의식의 신성을 일상의 삶 속에서 보존해온 거룩한 증거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북부 지방에서 널리 행해진 위령 굿은 이러한 신앙의 집약된 형태였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 의식의 중심에는 여성 샤먼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성의 슬픔을 하늘에 고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치유하는 실질적인 주권자이자, 가부장적 질서가 포기한 민초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지주였다. 비록 지배층은 이를 경계하고 배척했으나, 정작 국가적 가뭄이나 역병이 닥칠 때마다 여성들의 영적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가려진 여성 신성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전쟁과 기근이 반복되던 혼란의 시대 속에서 공동체의 생명을 지탱해 온 것은 산천과 안채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어머니들의 눈물어린 정성이었다. 그것은 개별적인 기도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며 축적된 거대한 심정의 물줄기였다. 이름 없이 바쳐진 그 기원들은 흩어지지 않고 민족의 심층 속에 쌓여 하나의 거대한 방향으로 응축되었다. 수많은 어머니가 각자의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올렸던 정성은 훗날 인류 앞에 드러날 하늘의 섭리를 준비하는 거룩한 마중물이자, 실체적 메시아로서 강림하실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가장 비옥한 영적 토양을 구축한 셈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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