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사건서 시작된 개념미술
작품 형태보다 ‘작가 아이디어’ 중시
언어·철학 중심으로 미술사 흐름 재조명
안규철 등 작가 28명 작품 140개 선봬
“보는 것 아닌 생각하는 것” 메시지 강조
191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립미술가협회전’을 앞두고, 작품 출품비 6달러와 함께 ‘샘(Fountain)’이라고 이름 붙인 작품이 출품됐다. ‘샘’은 남성용 소변기에 위생도기 제조회사 이름 ‘R. MUTT’가 적혀 있고 수직에서 수평으로 위치만 바꾼 젊은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허용된다면 아무거나 다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전시 관계자들은 출품된 ‘샘’의 작품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전시는 출품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전시 관계자들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다’ ‘대량 생산된 기성품(레디메이드)’이라는 이유로 뒤샹의 작품을 전시에서 제외했다.
자신의 취향이 굳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작가 뒤샹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예술 잡지 ‘블라인드 맨’에 전격 공개했다. 그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예술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현대 미술사에서 ‘예술’의 개념을 근본부터 바꾸어놓은 ‘사건’이 됐다. 외형 등 작품 자체보다 작가가 어떤 생각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느냐는 것으로 평가받는, 즉, 작품의 아이디어와 개념을 중시하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출발점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뒤샹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은 개념미술은 1960년대 중반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나의 독립된 미술운동으로 본격화했다. 이전의 미술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각 예술에 집중했다면, 개념미술가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거부하고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통해 관람자가 ‘생각’하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개념미술의 흐름을 한국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전시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가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10월11일까지. 입장료 2000원.
이번 전시는 한국 개념미술 전체를 망라하기보다는 언어와 철학적 차원의 개념미술과 작품에 좀 더 집중했다는 분석이다.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한국 개념미술 전체를 다루기보다 언어적 차원에 집중한 전시”라고 강조했다. 특히 1970년대 ‘ST(Space and Time) 그룹’의 작품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작가들이 왜 언어철학을 공부했고 그것을 행위와 결합하려 했는지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언어·논리·행위’, ‘사물과 언어’, ‘지도와 측정’, ‘기호의 조정자들’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 김범과 김순기, 김용익, 김홍석, 박이소, 안규철, 오인환, 이건용 등 작가 28명의 회화와 사진, 영상, 오브제, 퍼포먼스 등 작품 140여점과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백묵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고, 원 밖에 서서 원 중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라고 외친다. 이어 원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말하고, 다시 원 밖으로 나가 등을 돌린 채 어깨 너머로 원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친다. 이후 백묵 선을 밟으며 원을 따라 ‘어디’ ‘어디’를 외치고 퇴장한다.
1970∼1990년대 신체 행위와 언어, 논리를 결합해 미술을 감각적 재현이 아닌 사유의 구조로 바라보려는 시도를 담은 ‘언어·논리·행위’ 섹션에는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이건용의 1975년 행위예술 ‘장소의 논리’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은 동일한 장소라도 경계를 설정하고 몸을 움직이면 ‘저기’, ‘여기’, ‘거기’ 등 서로 다른 사건으로 인지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물과 언어’ 섹션에서는 언어가 사물과 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의미 체계를 흔드는 작업들이 제시된다. 김홍석의 작품 ‘하나이자 셋인 친구’는 개념미술가 조지프 코수스의 작품 ‘하나이자 셋인 의자’(1965)를 인용한 작업이다. 전시장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사진과 친구의 사전적 정의가 붙어 있다. 코수스가 실제 의자와 사진, 정의를 나란히 놓고 무엇이 ‘의자’인지 물었다면, 김홍석은 그 자리에 ‘친구’를 놓은 셈이다.
‘지도와 측정’ 섹션은 지도와 좌표, 시계 등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한다고 여겨온 체계를 의심하는 작업을 다룬다. 재일한국인 작가 곽덕준(1937∼2025)의 영상 작품 ‘4개의 시계’는 동일한 네 개의 시계를 나란히 배치하고,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도록 했다. 시계는 시간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는 장치지만, 얼마나 쉽게 어긋날 수 있는지 그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는 평가다.
‘기호의 조정자들’ 섹션에서는 신문, 광고, 잡지 등 기존 기호를 재배열하고 편집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작업이 소개된다. 26분9초 분량의 영상 작품인 김홍석의 2004년작 ‘더 토크’는 동티모르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를 인터뷰하는 작품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TV 인터뷰나 통역, 자막이라는 장치가 사실을 전달하는 기호로 보이지만, 등장인물과 통역사는 모두 배우이며 그가 하는 말 역시 외국어처럼 들리는 가짜 언어이다. 이를 통해 작품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실제 내용인지, 아니면 형식과 권위인지 묻는다.
전시 기간에는 작가와 함께 작품의 개념을 탐구하는 ‘작가의 수업’이 진행되며, 8월19일에는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국제 심포지엄 ‘개념과 미술: 한국과 아시아의 맥락에서’도 열린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현대미술을 구성하는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인 개념미술을 본격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었다”며 “이번 전시는 한국 개념미술을 세계 미술사 안에서 새롭게 위치시키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이번 국현의 전시는 단순한 한국 현대 개념미술 소개전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의 개념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사가 단색화와 실험미술 중심으로 서술되고 평가돼 오면서 대중의 이해와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이번 전시는 바로 개념미술을 한국 현대미술사의 또 다른 계보로 전면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묻는다.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미술이란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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