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울은행 건물을 리모델링
모서리 깎아낸 건물… 전면 흰글씨 덮여
全이 근로감독관에 보낸 진정서 형상화
입구엔 全이 벽뚫고 미래로 나오는 동상
‘AI 시대’ 인간의 존엄성 생각하게 해
딸아이와 서울 도심을 산책하다 노동 단체의 대규모 궐기 대회를 마주한 적이 있다.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절도 있는 박자에 맞춘 비장한 합창이 쏟아져 나왔고, 그 앞으로는 오와 열을 맞춘 이들이 ‘투쟁’, ‘사수’, ‘철폐’, ‘생존권’ 같은 단어가 적힌 강렬한 색채의 깃발과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딸아이는 겁을 먹은 듯 발걸음을 재촉했고 어느 정도 그 자리를 벗어난 뒤 내게 저 사람들이 뭐 하는 건지 물었다. 난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해주었지만, 이어진 “누구한테요?”라는 질문에는 정확하게 답할 수 없었다. 메시지의 수신자가 되어야 할 이들은 그곳에 없었고,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무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고등학교 사회과목 선생님이다. 버스 운전사들의 파업으로 많은 학생들이 지각했던 날, 그 선생님은 집회나 시위로 우리가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참아줄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셨는데,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전태일 평전’이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는 노조가 없었다. 그래서 노조의 활동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주는지 체감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언론에 실린 일부 대기업 노조의 높은 성과급 쟁취와 파업 소식을 접할 때면, ‘저런 게 노조의 역할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교 시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불편의 수용’과, 한국 노동운동사의 중요한 기점이 된 ‘전태일이라는 인물이 오늘날 ‘투쟁적인 거리 풍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전태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세상에 전달하고자 했던 방식과 현재 시위 방식 사이에는 너무 깊고 넓은 골짜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와 함께 산화했다. 비인간적인 노동의 부속품이 되기를 거부한 그의 죽음 앞에, 당시 지성인을 자처했던 대학생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명동 성모병원 영안실로 찾아온 서울대 학생들을 본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평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토록 말했는데, 죽고 나서야 찾아왔구나”라며 그들을 반겼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필요성과 함께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를 이루는 결정적인 시초가 되었다.
전태일은 노동자가 기계의 소모품이 아닌, 건강한 인간으로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이런 그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은 1981년부터 시작됐다. 이후 2005년 그가 분신했던 청계천 버들다리 위에 반신상이 세워졌다. 동상을 제작한 예술가 임옥상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러러보는 전태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져서 빛나게 하는 친근한 전태일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라고 회고했다.
2016년, 서울시는 ‘노동존중특별시’의 상징으로 ‘전태일기념관’ 건립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전태일이 분신했던 자리에서 서쪽으로 1.6㎞ 떨어진 청계천 변의 건물을 매입했다. 1962년 건축가 김정수(종합건축연구소)가 서울은행 수표교 지점으로 설계한 이 건물은 매입 당시 여러 차례의 증개축으로 원형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흥미로운 건 자본 축적과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은행 건물이,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는 전태일기념관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노동복합시설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자본과 노동이 상반된 개념은 아니지만, 자본을 위한 건물이 노동의 서사를 담는 그릇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어색하다.
모서리가 깎인 건물에서 눈에 띄는 요소는 전면을 덮고 있는 하얀색 글씨들이다. 임옥상 화백의 아이디어로 설치된 이 ‘글씨의 입면’은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를 형상화한 것으로 ‘외침의 창’이라 불린다. 당시 진정서의 수신자였던 근로감독관은 보건사회부 산하 노동청 소속이었는데, 현재는 고용노동부 산하 각 지역 고용노동청으로 그 직제가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기념관에서 230m 남짓 떨어진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을 바라보며, 진정서의 수신자들이 50년 전 외면했던 청년 노동자의 절박한 외침을 이제는 가까운 거리에 두고 지침(指針)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기념관 설계를 맡은 서울시립대 윤정원 교수와 하우건축사사무소는 기본계획 당시 기존 갈색 타일을 걷어내고 유리 입면을 적용하라는 종로구 심의 의견을 반영해 디자인을 변경했다. 하지만 전태일노동복합시설 건립추진위원회는 유리의 차갑고 현대적인 속성이 전태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기했고 다시 이를 수용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기념관은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화형식으로 세상을 일깨운 지 49년 만인 2019년, ‘근로자의 날’ 전날에 문을 열었다.
설계자는 글씨 뒷면의 유리창이 낮에는 어둡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밝은색 글씨를 택했다. 또한, 건물 입면에 붙일 수 있도록 각 글자가 서로 이어진 서체로 바꿨다. 현재 서체는 전태일의 필체를 임옥상 화백이 변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서체가 집회 현장의 깃발에 쓰인 강렬한 필치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건물은 전태일의 생애를 모르더라도 노동하는 이라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데, 마치 길을 걷다 마주친 궐기 대회처럼 날이 서 있고 비장하게 느껴진다. 버들다리 위 전태일의 동상이 시민의 손길로 반질반질해지기를 원했던 것과 달리, 기념관의 입면은 여전히 투쟁의 현장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뿜어내고 있다.
올해 5월 1일은 작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다. 우선, 전 국민이 함께 쉬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누구는 쉬고 누구는 일하냐’는 불편한 시선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법적 명칭이 ‘근로자의 날’에서 ‘노동절’로 제자리를 찾았다.
‘근로(勤勞)’와 ‘노동(勞動)’. 비슷하게 느껴지는 두 단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전적 정의상 ‘근로’는 부지런히 일하는 행위이고, ‘노동’은 몸을 움직여 일하는 행위를 뜻한다. 관점상으로는 ‘근로’가 사용자나 국가의 입장에서 수동성, 통제, 근면을 부각한다면, ‘노동’은 일을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능동성, 권리, 연대를 강조한다. 칼 마르크스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노동력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고 주장한 까닭도, 결국 노동자가 자기 삶의 주체적인 권리를 갖는 존재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2026년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본격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해다. 오픈AI(OpenAI)는 지난달에 ‘인공지능 시대의 산업 정책: 인간 중심 아이디어’라는 정책 제안서를 통해 주 4일제와 로봇세, 그리고 모든 시민을 위한 공공기금조성을 제안했다. 로봇세는 AI나 자동화 로봇을 통해 인간 노동자를 대체한 기업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기계가 창출한 이익을 인간에게 환원하는 시스템이다.
여전히 위험한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노동자가 있기에, 안전한 일자리를 보장하라는 1970년 전태일의 주장은 유효하다. 동시에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아닌 기계의 수단으로 창출된 이익을 모든 시민이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전태일기념관 입구 옆, 벽을 뚫고 ‘미래로 나오는 전태일 동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AI 시대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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