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휴전 번복 등 ‘카지노식 협상’
트럼프식 외교·안보 종잡을 수 없어
초강대국 美 대통령 발언 진위 의심
불확실성 증폭에 국제 질서도 흔들
치밀한 전략보단 본인 스스로 혼란
中도 즉흥적 트럼프 상대하기 쉬워
2기 행정부 전통적 견제 장치 실종
경험 부족 충성파 배치로 독단 가속
트럼프 발언 과도한 해석 경계해야
장기적으로 美 관료 움직임에 주목
北·美 협상 과정에서 ‘韓 패싱’ 막고
美·中 틈바구니 속 유연하게 대응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이란과의 휴전을 사실상 무기한 연장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전에 설정한 ‘2주 휴전’ 만료를 단 하루 앞둔 시점었다. 이란에 합의를 압박하며 ‘휴전 연장은 없다’고 큰소리를 쳐 왔던 것을 감안하면 갑작스러워 보이기도 했으나 그가 자신의 호언장담을 손바닥 뒤집듯 한 건 이미 여러 번이었다. 3월 21일 호르무즈해협 미개방 시 초토화시키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리더니 불과 이틀 후 공격 시한을 5일 유예했고, 이걸 또 열흘 미뤘다.
세계일보 인터뷰에 응한 국내외 전문가 10명이 ‘카지노식 협상’, ‘리얼리티쇼’라고 입을 모은 ‘트럼프식 외교·안보’의 실제 사례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거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할 그의 발언과 글은 진위를 의심받고, 심지어 하나의 ‘주장’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에 대한 신뢰의 약화는 곧 국제질서의 혼란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큰 부담이다.
◆원맨쇼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술로 흔히 언급되는 게 ‘미치광이 전략’이다. 상대를 극한으로 몰아넣은 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방식이다. 지난해 두 번째 집권 후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인상에 나설 때 자주 언급됐다. 예측을 할 수 없게 거칠게 판을 흔들지만 치밀한 계산을 염두에 두는 ‘협상가 트럼프’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혼란 그 자체로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은 “예측 불가능성은 일정부분 협상 전략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최근엔 효과 자체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트럼프를 치말하게 모든 걸 계산해서 움직이는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런 행태를 ‘트럼프 안의 다양한 트럼프’라고 표현했다. 김 교수는 “이란 전쟁 이후 보여주는 트럼프의 행동 양태나 언행을 보면 상대방을 혼란시키기보다는 본인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협상을 빨리 끝내고 싶은 트럼프, 이란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트럼프가 매일 아침 충돌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청한 일본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가능성이 강해지는 상황을 짚으며 ‘미국 행정부는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전제 아래 일본 정부가 정책을 펴는 경향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이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균형잡힌 인식없이 “미국과의 2인3각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사고방식뿐이다. 트럼프 정권 이후에는 어쩌려는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종잡을 수 없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패권 경쟁국인 중국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은 “1기 집권 때는 중국도 트럼프의 예측불가능성에 상당히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별 내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즉흥적인 트럼프는 중국이 상대하기가 훨씬 쉽다”고 말했다. 일본 전문가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 이란 전쟁 등을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상대로 벌이는 게임”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적용하기 쉬운 구도다. 중국에 그렇게 해도 된다는 위험한 신호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견제 부재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불확실성 증가는 ‘트럼프의 즉흥적인 원맨쇼’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행정부 내의 이목도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만 쏠려 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이란 전쟁과 관련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계획이 뭔지, 심지어 목표조차 모르고 있다. 모든 게 엉망진창”(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미국 정부가 시스템보다는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해진 것일까.
트로이 스탠가론 전 우드로윌슨센터 국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서며 전통적인 견제 장치가 대부분이 제거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전임자들보다 경험이 부족한 각료, 참모를 기용했다”며 “수지 와일스 비서실장조차 자신의 역할을 좋은 정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목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짚었다. 이어 “지지층 역시 충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트럼프를 제약할 장치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가오펑 중국 칭다오대 특임교수의 분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여당인 공화당이 미국 의회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의 상당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로 집권 1기 때 트럼프 대통령에 비협조적인 의원이 많았던 것과 확연히 달라졌다. 이는 올해 11월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의회를 탈환할 경우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오 교수는 “내각 역시 트럼프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다. J D 밴스 부통령,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의 순응적인 태도는 트럼프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 방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기 행정부 당시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존 켈리 비서실장 등 ‘어른들’이 있어 쓴소리를 했던 것과 대비되는 사정이다. 또 “트럼프 본인의 성격이 매우 강압적이다. 반대 세력에 대해 철저히 보복하며, 권력을 구속하는 제도들을 조정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집권 1기 이후 대법관들을 지명하며 미국 연방대법원 구성을 6대 3의 보수 우위 구도로 만들어 놓았다는 점까지 더하면 입법·행정·사법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제동을 걸 만한 장치 부재가 도드라진다. 헌법, 법률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아 애매한 것은 행정명령으로 결정하는 관행까지 더해지며 지금껏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로 간주되던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트럼프 ‘입’보단 ‘관료’
미국 정부에서 일관된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 상황은 국제사회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외교, 안보에서 미국과 얽혀 있는 게 많은 한국에는 더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과잉반응’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재천 교수는 “한국 분석가들의 ‘오버 리드’(over-read·과도한 해석)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트럼프의 즉흥적인 발언을 두고 ‘신의 한 수’니 ‘중국 견제용’이니 하는데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 일희일비할 것도, 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보다는 미국 관료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조언은 귀기울여 볼 만하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트럼프의 스타일상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입장을 뒤집을 수 있어 관료 입장에서는 당장 움직일 유인이 적다”며 “단기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미국 정치 시스템, 관료제를 믿고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합의한 팩트시트 이행 상황을 예로 들었다. 하 교수는 “정상적이라면 국무부, 국방부, 상무부 등이 후속작업을 해야 하는데 관료들이 움직인 흔적이 없다는 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미국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고, 이번달 14∼15일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주목받고 있는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한국 패싱’을 막아야 한다는 주문이 강했다. 전봉근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북한이 (남북) 대화 창구를 열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을 통해 한국에 필요한 의제를 잘 조율해야 한다”며 “평소 미국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의제에 대해 잘 이야기해둬야 한다”고 주문했다. 차두현 부원장은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전략이나 대안을 일부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며 “북·미 협상에서 비핵화 문제는 어떤 행태로든 계속 다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북한과 미국이 만나는 것을 장려하는 동시에 지금처럼 국제질서가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미국도 필요하고, 중국도 중요하다”며 “특정 진영에 고정되기보다는 유연하게 대응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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