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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의역사산책] 일제 강점기 아픔을 형상화한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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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세계 조선 민초들 비극적 삶에 초점
해방세대 청년들에 시대 의식 일깨워줘

조선 문단의 중진이자 전 동아일보 사회부장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이 1943년 4월25일 신병으로 경성부 회기정 자택에서 44세로 영면했다는 부음 기사가 ‘매일신보’ 1943년 4월27일 자에 실렸다.

당시 조선인 민간 언론매체가 폐간되었음에도 그가 언론인이자 소설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매일신보’도 그의 사망 소식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필자가 소설가 현진건에 관심을 둔 계기는 1970년대 후반 고등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빈처’였다. 국정 교과서의 무게도 묵직하기도 하였거니와 소설의 구성이라든가 말미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라는 구절이 필자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밖에 피천득의 수필 ‘인연’과 유주현의 ‘탈고안될 전설’ 등의 글이 왜 그리 ‘빈처’와 함께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였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소년의 그러한 내면 심리를 오늘날의 또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가부장적 사고에 갇혀 헌신적 사랑을 갈망하는 사춘기 소년의 치기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대한 서사로서의 역사와 개인의 사소한 삶이 어떻게 교차하며 충돌하였고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었다.

그래서 현진건의 소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읽어갔다. ‘불’을 읽고 조혼이라는 악습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운수좋은 날’을 읽고 나서는 제목과 달리 일제하 인력거 노동으로 살아가는 도시 빈민의 비극적 삶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가 온전한 서민으로서 살아갈 수 없었겠지만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그의 예리한 시선을 그들의 삶에서 한 번도 거두지 않았다. 또한 정간이 밥 먹듯이 반복되는 엄혹한 언론 통제 아래 철창신세를 지면서 그의 현실 인식은 여타 지식인과 달리 결코 무뎌지지 않았다.

그뿐이랴. 그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사회부장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일경에게 구속되었다. ‘동아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으로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하여 8월13일 자와 8월25일 자에 연거푸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 가슴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고 일제 관리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의 폭압이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며 더욱 극렬해지자 그는 여타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소설로 방향을 틀었지만, 영웅이나 위인이 아닌 서민의 삶과 비극에 힘을 실었다.

그가 신문 연재소설을 1939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무영탑’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 조영을 둘러싼 백제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를 통해 이들의 비극이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 서민이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하여 ‘빈처’와 ‘술권하는 사회’, ‘타락자’에서 보이는 지식인의 무기력과 내면세계에서 벗어나 ‘고향’, ‘운수좋은 날’, ‘신문지와 철창’에서 보이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포착하여 형상화하는 그의 변화 과정은 당시 윤동주, 문익환 같은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록 그가 1943년 만물이 소생하는 4월 잔인한 달에 안타까운 나이로 일찍 작고했지만, 해방 후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해방 세대 청년들에게도 사회와 시대에 대한 책무 의식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그의 소설을 읽는 청년을 만나고 싶은 필자의 희망은 부질없는 꿈이런가.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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