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자랐고, 복수는 시작된다”로 시작하는 짧은 줄거리만 머리에 담은 채 극장에 들어선 관객 앞에 펼쳐지는 연극 ‘THE WASP(말벌)’ 무대는 단출하다. 하얀 막을 배경으로 의자 두 개와 티테이블이 놓인 순백 무구의 공간. 헐렁한 옷차림에 전자담배를 피워대는 임산부 카알라 앞에 단정한 코트와 명품백을 든 헤더가 나타난다.
어색한 인사로 시작한 날 선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과거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쉴 틈 없이 펼쳐지는 90분 서사는 반전을 거듭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재회하는 학교폭력 복수극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인간 본성과 ‘폭력의 윤리’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 관객을 세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야. 별거 아닌 듯한 행동이나 말 한마디만으로도. 아주 사소할 수도, 엄청 클 수도 있는 영향을 주고받지. 그래서 기도해. 세상 사람 모두 서로에게 친절하기를.”(헤더)
무대 역시 반전을 거듭한다. 장막이 한 겹씩 벗겨질수록 그 표면 아래 숨어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다. 초반 흰 장막이 거둬지면 은식기로 상징되는 헤더의 단정한 삶이 자리한 중산층 거실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청부 살인 모의는 때로 블랙 코미디가 되어 객석에 웃음을 안긴다.
그러다 대화 속에 등장하는 거실 한쪽의 말벌(WASP) 박제 장식은 이 작품의 제목이자 전체 서사를 관통하는 상징이다. 헤더가 직접 설명하는 타란툴라 사냥벌의 생태는 잔혹하다. 말벌은 침을 쏴 거미를 마비시킨 뒤 굴로 끌고 가 그 몸 위에 알을 낳는다. 애벌레는 거미의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자라되 중요한 기관은 건드리지 않는다. 거미가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벌레가 성체가 되어 몸을 떠나는 순간, 비로소 타란툴라는 죽는다.
결국 헤더의 집은 사냥벌의 굴이다. 한 겹 벗겨질 때마다 잔혹한 진실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막이 걷히면 등장하는 것은 낡은 변기다. 20년 전 학교 화장실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상이 관객 앞에 잔혹하게 펼쳐진다. 모든 진실이 드러난 무대 위로 계획적 살인을 위한 비닐막이 깔린다. 칼을 가운데 놓고 헤더는 카알라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위험한 실험을 벌인다.
“나도 이 굴레를 끊고 싶어. 진심으로. 그런데 내 안에서 뭔가가 말하는 거야. ‘선함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라고. 적어도 너에겐 소용없어. 내 말이 맞아. 아니야. 내가 틀렸어? 내가 틀렸냐고?”
헤더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기회를 카알라에게 주지만 어릴 때부터 절망을 안고 살아온 카알라의 선택은 헤더 예상대로다.
여러 질문을 떠안고 극장을 나서면 드라마 ‘더 글로리’가 떠오른다. 학교폭력 트라우마와 복수 서사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러나 ‘더 글로리’의 처절하면서도 통쾌한 복수 대신 이 작품은 ‘복수조차 결국 가해의 언어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폭력의 피해자가 복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폭력 그 자체라는 것. 이 작품에 구원이 없는 이유다.
무거운 이야기를 관객이 끝까지 놓지 않게 만든 것은 원작을 오늘의 입말로 자연스럽게 옮긴 대본과 그 말맛을 치열한 연기로 살리며 치열한 심리전을 빚어낸 두 배우다. 영국 원작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이번 무대는 26일을 끝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성료했다. 헤더는 김려원·이경미·한지은이, 카알라는 권유리·정우연이 나누어 맡았는데 21일 무대에는 한지은과 권유리가 열연했다.
한 시대를 석권한 걸그룹 소녀시대 출신인 권유리의 연극 무대는 ‘앙리할아버지와 나’ 이후 두 번째.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사랑받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입지를 다져온 한지은 역시 연극 출연은 세 번째다. 연극판 출신이 아닌 두 배우가 90분 내내 단둘이 무대를 꽉 채우는 연기 대결을 벌인 셈이다.
특히 한지은은 헤더 내면의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기를 온몸으로 분출하며 무대를 압도했다. 학창 시절 화장실 기억의 회상부터 몸속에서 자라는 유령에 대한 고백,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난이도 높은 연기를 120% 소화해냈다. 올해의 연기상 후보에 오를 만한 무대였다.
헤더의 분노를 홀로 받아내야 하는 카알라 역의 권유리 역시 거칠고 날 선 생존 본능을 끄집어내며 극을 끌어갔다. 결코 소화하기 쉽지 않은 배역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도 되는 배우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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