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숲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산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한국에선 산과 산 사이에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선 끝없이 평야가 펼쳐졌습니다. 그 자연이 저를 멈추게 한 것이지요.”
1983년 12월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본 아르헨티나의 풍경을, 그는 4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나무들이 조각 재료로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조카의 말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겨울 방학을 이용해 비행기에 오른 그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원, 평원의 끝자락에서 겨우 보이는 숲, 숲을 가득 채운 나무들, 두 팔을 벌려도 포개지지 않을 거대한 나무들….
아르헨티나 자연 자체가 이미 훌륭한 작품 재료로 보였다. 한 달 정도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끝에, 상명여대(현 상명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젊은 교수 조각가 김윤신은 다짐했다. ‘아르헨티나의 이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평생 작업을 하고 싶어, 한국에서의 교수 조각가 타이틀보다도 이 좋은 나무들로 평생 작업을 하겠어!’
아르헨티나에 체류를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작업 환경이 잘 갖춰진 건 아니었다. 교수직을 내려놓은 그가 서 있던 곳은 아무 기반이 없던 이역만리 아르헨티나. 당장 좋은 나무부터 구하기 쉽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 작업하기로 했다. 아르헨티나 나무들은 크기도 어마어마했지만 수심이 단단했다. 한국에서 쓰던 끌과 망치 같은 조각 도구론 도저히 다룰 수 없었다. 더구나 작업실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에 길가에서 서둘러 작업해야 했다.
그는 공구 가게로 달려가 전기톱을 구입했다. 윙, 하는 굉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전기톱이 나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 손엔 나무, 한 손엔 전기톱’을 든 작가 김윤신의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체류 이후 첫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4―11」이 탄생했다.
나무 몸통을 과감히 파고들며 형성된 수직의 심부, 다채로운 형태와 크기의 수평적 돌기들, 나무의 틈 사이로 새겨져 있는 전기톱의 흔적들, 다이내믹한 조형 구조…. 단단한 아르헨티나 나무와 전기톱은 그에게 기존 작업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힘을 주었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이어졌다고, 태현선 리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분석했다.
“작가의 조형 변화는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이때 나타난 것으로 분석됩니다. 어떻게 보면 전기톱이야말로 작가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작가는 단단한 나무와 전기톱으로 조형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죠.”
나무를 재료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본질을 탐구해온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91)의 대규모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이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고, 호암미술관 최초 한국 여성 작가 회고전이기도 하다.
전시 이름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合二合一), 하나가 다시 나누어져 새로운 둘이 되는(分二分一) 음양의 원리와 영원한 순환, 조화라는 존재와 과정의 본질을 설명한 개념으로, 김윤신이 평생 작업의 근간으로 삼아온 조형 이념이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합이분일 분이분일 1984―11」을 비롯해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 판화부터 실험적인 평면 작업, 1984년 이후 역동적인 나무 조각, 60대 이후 몰입한 다채로운 회화까지 170여 점을 통해 김윤신의 예술 세계를 조망한다. 김성원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김 작가는 이미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지만,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그의 작품 평가는 달라질 것”이라며 “살아 있는 ‘올드 파워 작가’로서 한국 여성 조각가의 미술사적 의미를 국내외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장은 김 작가의 작업을 하나의 조형 세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평면과 조각이 한데 어우러지도록 구성했다. 1층 전시실에선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의 석판화와 드로잉, 1970년대의 캔버스 작업에 이어서 1970년대 중후반의 「기원쌓기」 조각 시리즈와 ‘합이합일’ 이념이 형성되던 시기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아울러 1983년 아르헨티나 이주 이후 전기톱을 사용해 남미의 육중한 나무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더욱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김윤신은 아르헨티나 체류 이후 첫 작품 「합이분일 분이분일 1984―11」에 대해 “나무가 너무 크고 단단해 전기톱을 사다가 자르고 힘들게 집으로 옮겨와 작업했던 작품”이라며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한 작업이고 너무 고생해서 정이 많이 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 특별 대여된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도 눈길을 끈다. 작품은 김 작가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지 4년째에 제작한 조각으로, 안정감 있는 밑둥 위로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돌기들이 서로 다른 각도와 밀도로 맞물리며 올라가 마치 조각의 뼈대를 이루는 듯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2층 전시실에는 김윤신 조각의 또다른 축인 돌조각과 함께, 2000년대 이후 다채롭게 변화한 나무 조각을 살펴볼 수 있다. 2층 전시장 외부에는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안데스 산맥의 웅장한 생명력을 담은 최근작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가 설치돼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이며, 입장료는 2만5000원.
“어릴 때부터 시골 산 밑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나무가 저이고 제가 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통에 제 친구인 소나무들이 다 거꾸로 쓰러진 장면을 봤어요. 소나무에서 기름을 빼려고 거꾸로 묶어 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버려진 소나무로 작업을 해 작품으로 보존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들을 작품으로 남기는 건 나를 남기는 일이자 친구를 남기는 일이죠. 나무가, 자연이야말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셈입니다.”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김윤신은 홍익대 조소과에 재학 중이던 1958년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공부한 그는 한국 조각계가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통해 모더니즘을 모색하던 시기에 수직 형태의 추상조각을 선보이며 독창적 예술세계를 펼쳤다. 이러는 사이 1973년 이우환, 권영우, 김창열 등과 함께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1974년에는 ‘한국여류조각회’를 창립해 여성 조각가들의 활동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상명여대 교수직을 버리고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그는 40년 가까이 남미에서 작업하며 독자적인 조각 세계를 구축했다. 한국적 감성과 동양적 사유를 기반으로 순수 추상의 조형원리, 여기에 남미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하면서 현대성과 역동적인 원시성이 공존하는 예술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제자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개인전과 김세중 조각상 수상,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되면서 다시 미술계의 재조명을 받았다.
“여전히 새롭게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그게 어떤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구순의 노 작가는 허리에 요대를 차고 작업실로 돌아가면 다시 전기톱을 들 것이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전기톱은 나무를 향해 맹렬히 돌진할 것이다. 오랜 시간 어떤 형상을 기다리며….
“저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지요. 그 마음이 육신과 하나가 돼 집중하면서 작업합니다. 다만, 젊을 때는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만들까를 고민했다면, 이제 나이가 드니 저와 예술이 하나가 돼서 어떤 표현이 나올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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