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인권 수호 서사 정면으로 반박
수많은 모순 통해 ‘선의의 권력화’ 고발
언론·시민 비판적 감시 역할 중요성 강조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노엄 촘스키·네이선 J. 로빈슨/심운 옮김/메디치/3만8000원
언어학자이자 미국 대외정책의 대표적 비판자인 노엄 촘스키와 진보 매체 ‘커런트 어페어스’ 공동 설립자 네이선 J. 로빈슨이 공저한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들은 미국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 규정해 왔지만, 실제 행보는 그와 상반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책은 단순한 반미 담론을 넘어 국제정치에서 반복되어 온 미국 권력의 작동 방식을 해부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우선 책은 미국이 구축해 온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라는 서사를 정면으로 해체한다. 저자들은 이를 ‘이상주의의 신화’라 부르며, 실제 정책과의 괴리를 지적한다.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는 것이 미국의 중동 개입, 특히 2003년 이라크전쟁이다.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분 아래 시작된 이 전쟁은 오히려 장기적 내전과 종파 갈등을 초래했고, 극단주의 세력의 성장 기반이 됐다. 저자들은 “인권을 명분으로 한 개입이 오히려 더 큰 인권 침해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책에 따르면 당시 부시 행정부는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공포를 조성했다. “이라크를 즉시 침공하지 않으면 뉴욕 상공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것”이라는 식의 발언은 대표적 사례다.
딕 체니 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했지만, 이는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드러났다.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행정부 인사들이 사실과 어긋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 사례는 200건이 넘는다.
부시, 체니,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등 주요 인사들은 전쟁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추가 검증의 필요성을 차단했고, 반대 의견을 제기하는 이들을 ‘비애국적’으로 몰아갔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대량살상무기를 동반한 또 다른 9·11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위기감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밝혀진 사실은, 대량살상무기 존재는 물론 알카에다와의 연계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패턴은 반복된다.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위한 방어적 조치로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민간인 피해와 환경 파괴를 남겼다. 특히 고엽제 살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간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했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미국의 군사 개입이 단기적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지역마다 갈등과 불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이라크와 베트남에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러시아 관계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미국 패권의 작동 방식을 추적하고 미국의 야욕이 세계를 어떻게 차례대로 파괴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책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미국의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분이 정책 정당화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자기 미화의 신화’가 이제는 세계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한다.
비판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월3일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기습적인 군사작전을 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하며 ‘서반구 내 미국의 배타적 우위’를 실현했다. 2월28일에는 이란 핵 시설 및 지도부를 겨냥한 폭격과 공습을 단행하며 중동 내 적대 세력에 대한 강력한 응징 의지를 드러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행보의 명분으로 마약 단속과 테러 방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인 베네수엘라의 에너지 자원을 장악하고, 중국·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일방주의적 국제 질서를 강요하는 ‘트럼프식 실용 패권주의’가 놓여 있다고 분석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미국 외교는 ‘이중 기준’ 위에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인권 문제에 대한 대응은 국가에 따라 다르고, 전략적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에는 관대하고 그렇지 않은 국가에는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원칙이 아닌 이해관계에 기반한 외교”라고 규정한다.
책을 읽다 보면 국제사회에 인도주의와 도덕적 원칙을 실현하려는 미국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올 수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저자들이 던지는 질문 자체다. 강대국의 행동을 도덕적 언어로만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과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저자들은 세계 질서를 이끄는 중심국가인 미국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 왔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모순을 통해, ‘선의’라는 개념이 언제든 권력의 언어로 변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언론과 시민의 비판적 감시가 없다면, 초강대국 미국의 대외정책은 언제든 다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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